2012년 9월 12일 수요일

애플과 삼성 그리고 경쟁


애플과 삼성 그리고 경쟁
박철홍
애플과 삼성의 진흙탕 같은 특허 전쟁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각각 자국에서는 유리한 판정을 받았고 제3의 국가에서는 판결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추세이다이 사건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경쟁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이 글은 애플과 삼성의 소송사건이 현재 2012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에 관한 것이다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무한 정글의 법칙의 이면을 추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제품을 판매할 때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효과를 준다서로 공생관계이기도 하다.경쟁의 룰은 공평해야하고 정의롭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어느 순간 그 경쟁의 구도는 고정화된다제한된 시장에서 경쟁자들은 서로의 영역이 구축되면서 이제부터는 서로의 견제가 있고 자기의 고객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으로 된다충성고객은 만들어지고 각각의 회사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게 된다경쟁은 어느 시기에 서로 강한자를 알아보게 되고그래서 서로를 위해서 그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서로의 일정 영역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경쟁의 말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기득권의 고착화라고도 말한다. 2007년 대한민국 핸드폰 역사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난다.
2007년 애플사의 스티브잡스는 완전히 새로운 핸드폰을 세상에 내놓았다그것은 이제까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그래서 잡스가 말했듯이 시장에 없던 것이기 때문에 시장조사까지도 무의미하다고 했던” 핸드폰인 아이폰3S를 발표한다.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전의 핸드폰과 인터넷 상황은 대략 아래와 같다삼성과 엘지로 대변되는 핸드폰으로 잠깐 인터넷을 장시간 사용했을 경우에 요금폭탄이 다음달 고지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는 것은 애플의 아이폰이 나오기전에도 이미 국내에서 가능했었다필자도 대학교 1학년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했다당연히 요금은 매우 비쌌다그래서 국내의 핸드폰의 사용자들은 아예 인터넷을 잠금모드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을 정도였다이러한 상황은 필자가 대학교1학년때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군대를 갔다오고도 한참이 지난 2007년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의 인터넷은 그냥 폼이었고지금의 아이폰 같은 혁명은 아예 생각도 못했다문자 그대로 국내 핸드폰은 전화를 받는 용도였다그 당시 국내 핸드폰 제조사의 점유율은 대략 99프로였다.


그런데 애플사에서 정말 놀라운 핸드폰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그 충격은 윈도우가 전 지구를 휩쓸웠던 기세와 비슷했다인터넷의 개방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료라니충격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소비자는 물론이고통신업체와 경쟁제조사에게도 비상이 걸린 것이다컴퓨터 시장에서도2인자 취급을 받던 애플사가 핸드폰 시장에 뒷통수를 치며 나타난 것이다삼성과 엘지가 사이좋게 나눠먹던 핸드폰 시장은 급격하게 붕괴되었다그래서 한 때 TV광고는 와이파이라는 단어가 난무했고아이폰은 국내시장을 빠르게 점유해갔다와이파이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다시 그 때를 생각해봐도 국내의 통신업체와 제조사들은 핸드폰 인터넷의 저렴한 가격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본과 기술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이용한 인터넷 시장의 선점을 놓치고 말았다괜히 다른 업체와의 공격적 마케팅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핸드폰과 인터넷을 제조사 통신사의 담합으로 사이좋게 나눠먹다가 그것을 완전한 개방화를 표방한 회사로 인해서 일순간 점유율을 빼앗겨버린 사례이다지금도 아이폰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대략 20프로 이상으로 이것에 관한 어느 양심있는 학자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소비자가 자국기업의 횡포로부터 해방된 사건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비단 가전제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이렇게 고착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쟁은 어떻게 다가올까사실 이 부분이 필자가 쓰려고 하는 요지이다애플과 삼성의 경쟁을 보면서 느낀 지점이기도 하다아마도 삼성과 엘지는 애플에게 빼앗긴 자국의 안정된 시장이 못내 아쉬울 것이다특별한 혁신 없이도 애국심광고만으로 별다른 불만 없이 구매하는 충성고객이기 때문이다그런 자신들의 시장을 빼앗긴 것은 참으로 비통했을 것이다이제까지 받지 못했던 환상적인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리가 없다국내 시장에서의 삼성과 엘지의 시장 점유율은 여전하지만또 앞으로 핸드폰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제3의 기업이 들어와서 흔들어버린다면 어떠할까그게 아마도 가장 무서운 이야기일 것이다애플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는 애플TV는 어떠할까이 부분이 아마도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흔들 것이라 기대해본다.


애플은 한국에서 외계인 같은 존재이다저항할 수 없었던 이상한 존재쯤으로 여겨진다그래서 대한민국 언론을 조작할 수 있는 대기업은 애플의 소비자가 된 사람들을 앱등이라면서 비하한다그렇게 고립시키는 것이다더 이상의 자신들의 충성스런 고객들이 눈을 못 돌리게 하는 야비한 전략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대기업의 횡포에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완전히 고착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까어떠한 선택을 할까어떠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될까예전에 대한민국 최소한 필자가 태어날 시기까지 대한민국의 트렌드는 공부 잘 하면 잘 먹고 잘 산다”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명예지위를 얻는데 성공했다.그냥 서울대만 나오면 다들 사회에서 한자리씩 먹고 살아갔다심지어 서울대를 나오면 포장마차를 해도 대박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그 어떠한 배경이 상관없이 그러했다그냥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통과되었다.


현재 2012년도 공부를 잘하면 그 사람의 지위와 명예가 보장될까지금은 그렇지 않다공부잘하고 똑똑해도 삼성의 직원일 뿐이지삼성 같은 기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정주영처럼 아무것도 없이 현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이미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골목상권까지 싹쓸이해버리는 상황이다지금은 공부의 능력과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영업을 하든지 아니면 대기업의 직원으로 존재한다그것이 협력업체이든 자회사이든 그렇게 양분된다자 여기서부터 약간은 충격적인 단어를 사용할까한다.


자발적노예” 노예라는 말이 비위에 거슬릴 수도 있지만 명백하게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가장 정확한 단어라 확신한다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대기업의 모든 것을 다 사용하기 때문이다의식주에서 주는 대부분 아파트가 차지한다아파트는 대기업이 만든 시멘트인데 원가로 따지면 평당 100만원 미만의 아파트를 억대에 구입 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대략 2억을 모으는데에는 20년정도가 걸린다평생을 다 바쳐서 사회적 부가가치를 만들고 모아놓은 잉여생산물을 재벌에게 고스란히 그것도 자발적으로 내어준다음식의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그렇다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지금 거의 자발적 노예상태이다심지어 해외여행도 대부분 패키지로 이루어지는데 해외의 숙박시설부터 가이드그리고 가이드가 추천하는 음식점까지 유명도시는 사실은 자신들끼리 돌려먹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고착화된 사회는 비단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외국도 비슷하다영국,일본미국 강대한 나라들은 대부분 그렇게 자신들만의 리그를 살아간다그리고 그들 나라의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도 대부분 비슷하다스포츠스타와 음악 즉 아이돌이다. 사회적 성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하고그곳도 역시 고착화되어 있는 시장이지만 능력이 최우선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게다가 개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이다.


어느덧 우리는 스포츠 스타 마케팅에 노출되어 있고아이돌이 시장을 장악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그래서 스포츠와 음악 댄스에는 인재가 넘치고 정작 공대나 다른 업종에서는 사람이 부족한 현상을 격고 있다경쟁이 치열한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스포츠스타와 아이돌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이제 한류가 시대의 대세라고 말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이 잘나가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믿게 된다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이곳이다지금의 한류는 결코 사회가 올바르기 때문에사회가 정의가 넘치는 사회이기 때문에그리고 우리 사회가 아주 경제적 호황을 이루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지금의 한류는 다른 분야에서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근거가 된다그 경쟁이란 중산층 이상이 된다는 것.즉 부르주아가 될 수 있느냐이다.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숨어있는 욕망이 있다면 사회적 성취감이라고 할 수 있다근대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사회적 성취감은 철저하게 신분제로 정해졌다따라서 사회적 성공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만 가능했고조선의 고전 홍길동전은 사회적 성취감과 사회 제도간의 충돌을 설명한다지금의 대한민국은 신분제 사회는 아니다그런데 사회가 정체되고 고착화되면 되어 있다면 사실상 신분제 사회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구성원들은 그러한 압박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아간다예전에는 공부가 그 사회적 성공의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부류는 치밀하게 연구한다.아직도 여전히 공부가 사회적 성공의 지름길이라 믿는 부류가 존재한다인간의 보수성은 여전하기 때문이다눈치 빠른 사람들은 스포츠와 아이돌이라는 부류로 이동한다방송매체에서 오디션프로그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그 경쟁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부류가 생겨난다. 1990년대에 공무원은 멍청해서 한다는 말이 있었다그 시기에 얼마나 대한민국이 역동적이었는지를 단번에 말해준다부르주아가 될 가능성이 적어지자 사회는 어느새 공무원이 사회적 대세가 되었고사회의 모든 에너지가 공무원에 쏟아지는 낭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냥 적당히 삼성맨이 되면 단순히 다른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하고공무원이면 안죽고 숨쉬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자랑할 만하다이토록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안 죽는 것이 지상과제인 것이다이러한 사회현상은 이미 경쟁을 포기한 곳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것이다이 땅의 지상과제는 공무원이 되든지아니면 대기업의 사람이 되든지로 양분되고 그 나머지는 그 경쟁에서조차 밀린 패배자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주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스포츠와 아이돌로 사회적 성공의 해답인 것처럼 사회가 몰아가고 있다박지성의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입성은 대한민국 남성들에겐 자존심을김연아의 눈물은 대한민국을 울렸다박지성과 김연아가 부르주아적 계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그것은 아주 뛰어난 공부와 능력으로 삼성에 입사해서 상무가 되어도 이들보다 더 많은 돈과 인기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미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박지성이 일주일에 1억을 넘는 돈을 번다고 한다김연아의 광고 마케팅은 이미 기존의 연기자들을 넘어섰다그리고 이어지는 기사들은 해외에서 누가 누가 스포츠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들이다.


유명팀의 유소년축구팀에서 주장을 하고 있다는 뉴스미국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들한류의 음악이 라틴을 강타했다는 소식사실 이 모든 것이 20년 전에 일본, 30년전에 영국 등에서 나타났던 사회적 현상이다그러한 경쟁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유럽의 축구시장은 유럽인에게는 진실로 부르주아가 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다그냥 힘으로 축구만 잘하면 되는 것이고자신들이 유럽인이라면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그런데 그 축구시장에 흑인과 아시아인이 들어오고 있고그 만큼 유럽인들은 축구인의 생산자에서 배제되고 단순한 소비자가 되고 있음은 자명하다영국이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를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자국의 월드컵 성적은 기대이하이다영국인이 얼마나 자국 축구시장에서 배제당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강타한 키워드가 있다면 커피가 될 것이다스타벅스로 시작된 커피시장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과히 커피가 대한민국을 마셨다가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커피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허영심이다과시욕과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를 뽐내고 싶어하는 그 지점에 있다단순하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뉴욕을 따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인 것이다스타벅스에서 노트북과 서류를 만지작거리면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폼나는 행위가 될 것이다.그래서 스타벅스는 뉴욕커가 된다사회적 성공을 포기한 부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허영심이 커피와 함께 투사되었다고 판단한다누구나 아주 작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커피 한잔의 원가가 100원도 되지 않는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그런데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100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자신의 허영심사회적 성공은 포기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욕망이 비싼 커피와 함께 어울린다그 씁쓸함자신이 결코 이 사회적 성공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최후의 저항이다우리 사회에 사회적 성공(부르주아)을 포기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커피를 마시는 이 허영심은 사실 슬프고 쓴 커피라 믿는다.


경쟁의 왜곡은 진짜 엉뚱한 사회적 에너지로 쏠리는데 그것이 성인비디오시장이다미국일본영국 등은 전 세계적인 성인비디오시장 생산국이다엄청난 사회적 잉여생산물을 쏟아낸 결과물로 예쁜 얼굴몸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투자에 대한 미련은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왜냐하면 모든 투자가 TV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TV의 제한된 시간은 그 경쟁에서도 처절하다필자는 성인이며성인비디오를 법적으로 허용한 범위에서 즐겨본다그런데 일본미국영국러시아 등의 성인비디오에 비해서 한국 성인비디오의 여성들의 비주얼은 최악이다필자는 이 부분이 아직 우리 사회가 경쟁의 마지막 단계에까지는 오지 않았다고 본다그러나 언젠가 성인비디오시장이 커지고 고수익을 얻는 단계가 되면 비주얼이 지금의 일본을 압도할 것이라 확신한다일본 성인비디오의 여배우가 한편에 많게는 수억까지 배당금을 받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놀랍게도 한국의 성인비디오시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있고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경쟁은 대기업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상황에서 일정 부분은 포기하고 또 일정 부분은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을 삶의 마지막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그리고 그 잠재된 사회적 성공의 욕망은 스포츠와 아이돌로 대변된다.
어쩌면 우리는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에서 진짜로 배워야할 교훈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움켜쥐는 저 재벌들을 이길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아닐까애플은 이 땅의 재벌을 이기는 법을 보여줬다그들의 기득권을 잡아 낼 수 있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줬다고 본다재벌들이 서로간의 경쟁이 아닌 나눠먹기하고 있는 그 지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 카카오톡이 있다통신사의 압박에 굴하고 않고 무료문자서비스음성통화까지그리고 기대해본다화상통화까지 무료로그래서 저들이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어갔던 추잡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만천하게 공개되어서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못 붙이게 되기를 바란다사실 이미 화상통화문자서비스그리고 매우 싼 음성통화의 기반은 마련되어 있다그것인 각각의 핸드폰이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미 우리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로 음성통화화상통화채팅을 일정 금액의 돈을 내고 무제한으로 해왔다왜 핸드폰에서는 안되는 것일까우리의 호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번 아이폰5에서는 화상통화가 기존 와이파이존이 아닌 3G에서도 무료로 되는 기능을 탑재한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이제 애플이 소비자가 어려워하는그것도 금전적으로 어려워하는그래서 원래 있는데 쓰지 않는 기능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아마 영상통화가 제한이 없어진다면 지금의 통신사는 그 더러운 가면을 벗게 될 것이다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채팅문자화상통화심지어 음성통화까지 사실상 지금 각각의 집에 설치되어 있는 인터넷 정도의 비용이면 된다는 사실에 직면할 것이다기억하자애플이 뚫고 있는 그 지점우리 혹은 우리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할 경쟁 루트는 아닐까?
애플과 삼성의 소송을 보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고착화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가 필요한가를 생각했다.아무리 기업이 혁신과 경쟁의 관계에 놓이게 되더라도 소비자가 이미 충성고객으로 변화하는 그 순간 기업의 혁신은 없어지고 오직 영역 지키기만 존재하게 된다현명한 소비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발 빠르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내 국가내 고장내 친척심지어 내 가족이기 때문에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의 노동의 댓가를 제품과 교환하는 것이기에 철저하게 나의 이익에 규합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이러한 방법은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에도 철저하게 적용된다우리가 얼마나 멍청한 소비자인지 그리고 유권자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너무나 과한 과잉충성고객은 언제나 기업과 정치인에게 뒷통수를 맞게 되어 있다그리고 나의 경쟁도 비참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2012년 6월 1일 금요일

만들어진 전통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p. 19.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용어는 광범위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확하지는 않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발명되고 구성되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전통들'은 물론이요, 그 기원을 쉽게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추정은 가능한 시기-대략 수년 사이-에 등장해 급속하게 확립된 '전통들'이 모두 포함된다. p.20.

  

잡스의 고민으로 누가 이득을 얻었을까?

  문득 스티브잡스를 생각해본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혁신을 생각해냈던 사람이다. 그의 고민은 새로운 것. 우리처럼 언제 휴가일까?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할까? 등의 고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잡스의 그러한 고민은 한국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민을 덜어주었다고 본다. 그것은 새로운 제품에 대한 판매에서 한국적 판매방식의 잔인함에서 벗어나게했다는 것이다. 무슨말이냐면 개인에게 부과되는 할당량이다. 개인에게 적용되는 한달의 몇개 판매는 아주 치졸하고 더러운 회사운영방식이다. 제품의 성능과 만족도를 그것을 개발하는 개발자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자야 어떻게 만들든 판매자에게 떠넘기는 아주 치사한 방식이다.

  다시 이야기를 잡스로 돌려보자. 잡스의 놀라운 제품들은 소비자들에게 놀라움과 신선함을 주었고, 잡스의 고민 덕분에 판매자들은 그 판매에 대한 고민에서 일정부분 해당될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삼성 핸드폰의 판매가 과연 단순하게 그 제품의 위대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직원을 정말 피말리게 쥐워짜면서 결국 자뻑도 하게 만들면서 거의 반 강제적으로 그 판매자의 가장 가까운 가족을 팔게하는 것은 아닐까?

  삼성의 새로운 제품이 나올때마다 우리는 삼성이라는 감옥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그 제품의 개발자에게 그렇게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회사는 그 제품의 판매는 가장 낮은 부류의 판매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기에 개발자는 잡스와 같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살아가지 않는다.

  필자는 이 지점이 진정으로 삼성과 애플의 차이라고 본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삼성이 마치 스마트폰을 선도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분명히 스마트폰의 앞길은 애플에서 선도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국내신제품들의 광고에서 등장하는 과도한 하드웨어 경쟁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이폰과는 분명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애플의 판매자와 삼성의 판매자라면 누가 더 행복한 비명을 지를까? 우리에게도 잡스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괜히 힘없고 약한 최하의 판매자들이 실로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에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의 풍경

일본 근대의 풍경 - 유모토 고이치, 연구공간 수유 + 너머 동아시아 근대 세미나팀 역, 그린비, 2004.

  기독교가 빈민구제사업, 요양소 설립, 폐창운동, 감옥개량운동 등의 사회사업이나 학교교육에서 펼친 활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학교교육 면에서는 전국적으로 미션스쿨을 만들어 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며, 특히 여성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렇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여성교육이 행해지면서 새로운 인간관이나 사회관을 가진 여성이 길러졌고 그녀들은 사회개혁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p. 59.

  문명개화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스등이다. 어둠의 세계가 지배하는 밤이 되면 초롱불 따위로 겨우 자기 주변만 밝히는 것을 당연시했을 시대에, 사람들은 해 뜨면 활동을 시작하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가 흐릿한 호롱불 아래서 밤시간을 보냈다. 어둠은 요상하고 변화가 무척 심한 두려운 별세계였기 때문에 인간이 끼여들 틈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환경을 뿌리채 뒤집어 놓은 것이 바로 가스등이다. 가스등의 출연으로 어둠의 세계는 인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고, 휘황찬란한 가스등의 불빛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다름아닌 문명개화의 마법적 사건을 의미했다. 꽃가스등 (하나가스 ; ) 이라는 장식이나 광고 용도로 사용되는 가스등도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네온사인의 원조라고 할 만했다. p.  153.




2012년 4월 29일 일요일

자동차 엔진 오일 교환주기에 대한 소비자보호원자료


자동차 엔진 오일 교환주기에 대한 소비자보호원자료

짧은 엔진오일 교환주기가 소비자에게 시간 손실 및 경제적 부담이 되고 국가적으로도 낭비를 초래하여 자가운전자, 택시회사, 자동차사, 엔진오일 제조사, 부분정비업협회를 대상으로 오일의 교환 실태와 의식을 조사
□ 평균 엔진오일 교환주기가 6,110㎞에 불과하고, 78.2%가 교환소에서 넣어 주는 대로 받거나, 권유된 상품 중에서 선택을 하는 등 소비자의 상품선택이 취약하며, 오일 교환주기 경과경험자 중 64%가 오일을 제때 교환하지 못해 불안감을 겪었을 정도로 엔진오일 정보가 부족한 것으로 조사됨
□ 엔진오일을 필요시 보충하면 15,000㎞이상 운행할 수 있음에도 소비자들은 정보부족으로 짧은 거리를 운행한 후 교환만 하고 있는 실정임
□ 국내 자동차사들이 신차·노후차량의 경우도 엔진오일 조기 교환이 필요없으며, 엔진오일 조기 교환과 엔진성능 향상, 엔진오일을 오래 사용하는 것과 환경오염이나 연비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는 실험 결과가 있으나 제대로 정보제공이 안되어 사회 전반(엔진오일 제조업계, 정비업계, 소비자)에 잘못된 인식이 만연되어 연간 약 3,300억원 이상이 낭비
□ 최근 자동차와 엔진오일 성능의 비약적 발전으로 외국 자동차사가 교환권장주기를 15,000㎞∼20,000㎞로 늘렸으나, 우리의 경우는 수출용에만 외국 자동차사와 유사한 주기를 권장하고, 국내에서는 외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10,000㎞를 권장하고 있으며, 또한 '가혹조건'을 광범위하고 추상적으로 설정하고 있어 소비자의 적정 교환주기 설정에 혼란을 줌
□ 엔진오일 교환시 대부분 5가지를 일괄비용으로 계산하고 있어 소비자의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며, 정비업체가 소비자와 생산자 중간에서 가격이나 서비스의 질을 좌우하고 있고 가격투명성이 미약하여 소비자에게 불리
□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자동차사 등 관련 사업자에게 '가혹조건'의 구체화와 권장 교환주기 연장을 요구하고, 엔진오일 교환비용의 부분별 가격 별도 표시방법 시행을 요구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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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개요
- 자동차 보유대수가 1,000만대(이중 73%가 승용차) 이상으로 대중화시대가 실현되었으나 '98년 6월 우리원에서 실시한 승용차 소비실태 조사결과 엔진오일 교환주기가 짧아 소비자에게 시간 손실 및 경제적 부담이될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낭비를 초래
▷ 현재 우리나라는 국산 엔진오일의 원료인 윤활기유의 55%, 엔진오일첨가제의 경우는 100%를 외국으로부터 수입(약 1억5천만 달러)
⇒ 이에 엔진오일 교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개선을 유도하기 위하여 '98년말 수도권 자가용 운행자 624명, 34개 택시회사, 자동차사(3개사), 엔진오일 제조사(6개사), 부분정비업협회를 대상으로 엔진오일의 교환 실태와 의식 등에 대해 조사를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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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조사 결과
1) 자가용의 평균 엔진오일 교환주기 : 6,110㎞(영업용의 1/2에 불과)
▷ 특히 66.3%가 5,000㎞ 이내에서 엔진오일을 교환하고 있고, 3,000㎞이내에서 교환하는 경우도 전체의 10%나 차지
▷ 영업용 택시의 엔진오일 교환주기 11,900㎞와 비교해보면 약 1/2수준이며, 자가용의 최저 교환주기는 2,500㎞, 영업용택시는 7,000㎞로 나타남
2) 정비업소에서 가장 짧은 교환 주기를 권해
▷ 5,000㎞이하에서의 엔진오일 교환 실태를 분석해 본 바 주로 정비업소들이 가장 짧은 교체주기를 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음
3) 엔진오일 보충 : 택시 93.6%, 자가용 20.9%
▷ 택시는 100% 모두가 엔진오일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며, 93.6%가 오일을 보충하는데 반해 자가용은 20.9%만이 엔진오일을 보충했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가혹조건에서 운행하는 영업용택시의 엔진오일 교환주기가 자가용보다 더 긴 원인으로 작용
4) 70.5%가 부분정비(경정비)업소에서 교환
▷ 응답자의 70.5%가 엔진오일을 부분정비(경정비)업소에서 교환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나머지는 자동차사의 직영·지정정비공장(17.5%), 자가정비코너(5.9%), 세차장(4.8%)의 순임
5) 엔진오일 상품 선택 : 21.8%만이 본인 지정, 교환업소 영향력(78.2%)
▷ 엔진오일 교환시 소비자가 상품을 직접 선택하는 경우는 21.8%에 불과하며, 78.2%는 교환업소의 종사자가 넣어 주는대로 받거나, 업소에서 권유된 상품 중에서 선택을 하는 등 소비자의 상품선택이 취약함
6) 운전자의 89.3%가 자동차업계에서 설정한 가혹조건에서 운행
▷ '짧은 거리 반복운행' 77.6%, '공회전·가다서다를 반복' 64.2%,'모래·먼지가 많은 지역 운행' 28.7% 등 전체 응답자의 89.3%가 자동차사가 설정한 가혹조건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가혹조건에서의 운행이 일상적인 현상임을 보여줌
7) 62%가 교환주기 경과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 64%는 불안감을 느껴
▷ 운전자의 62%가 자기 나름대로의 엔진오일 교환주기 경과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때 64%는 엔진오일을 제때 교환하지 못하여 불안감을 겪었으며, 여성(84.2%)이 남성(59.1%)보다 심하게 불안감을 느꼈던것으로 나타남
8) '신차와 노후차의 경우는 조기에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한다'는 의식 :자동차 업계만 모두 부동의, 엔진오일 제조업계와 정비업계, 소비자들은 높은 동의, 택시보다 자가용의 동의율이 높음
▷ 자가용의 62.8%, 영업용의 60.6%가 '신차의 최초 엔진오일 교환은2,000㎞이내에 해야 한다'고 응답하였으며, '엔진이 노후되면 오일교환 시기를 단축해야 한다'에 대해서 자가용 61.3%, 영업용 45.5%가 '그렇다'고 응답(운전경력이 많을수록 조기 엔진오일 교환의식이 높음)
▷ 자동차사는 모두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반면, 다수의 엔진오일제조사와 부분정비업계는 '그렇다'고 답변
9) '엔진오일 교환주기가 엔진성능·환경오염과 관련된다'는 의식 :자동차사들은 부동의, 소비자와 엔진오일 제조사는 비교적 높은 동의율을 나타냄
▷ 자가용의 34.2%가 '오일 교환주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엔진성능이 향상된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53.4%는 '오일 교환주기가 늦으면 늦을수록 환경오염을 유발한다'고 인식
▷ 자동차사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나, 엔진오일제조사는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로 양분된 의견이 제시되었음
10) 교환비용의 부분별 가격표시 도입에 대한 의견 : 찬성 87.5%, 반대 1.6%
▷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현재 오일 교환시 엔진오일, 오일휠터, 에어크리너엘리먼트, 공임, 폐기물처리비용 등 5가지를 일괄해서 비용으로받고 있는 것에 대해 부분별 가격 별도표시 방법의 도입을 원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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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오일 교환과 관련된 문제점
1) 외국 자동차사나 수출용보다 짧은 우리 자동차사의 권장 교환 주기
▷ 최근 자동차와 엔진오일 성능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외국 자동차사가 엔진오일 교환 권장주기를 15,000㎞∼20,000㎞로 늘렸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수출용에만 외국 자동차사와 유사한 주기를 권장하고, 국내에서는 외국의 약 절반 수준에 불과한 10,000㎞를 권장
▷ 오히려 유럽의 자동차사들은 환경오염 방지, 자원 절약, 소비자의 경제적 이익 보호를 위해 우리나라보다 교환주기 연장에 적극적임
2)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가혹조건 표시와 가혹조건 검증의 불투명성
▷ 자동차사와 엔진오일 제조사는 표면적으로 10,000㎞의 교환주기를 권장하고 있으나, '가혹조건'을 추상적이고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있어 소비자의 적정 교환주기 설정에 혼란을 줌
▷ 자동차사가 가혹조건으로 명시한 택시는 자가용보다 더 저등급의 엔진오일을 사용하면서도 오일 교환주기가 길며, 평균 폐차 주행거리는 자가용의 4배 이상인 52만㎞임
▷ 미국자동차기술협회(SAE)가 가장 가혹한 운행상태인 순찰차가 5,000㎞까지 오일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에 승용차에 비과학적으로 가혹조건을 설정하고 5,000㎞의 교환주기를 권장하는 우리나라 자동차사들의 엔진오일 교환 권장기준은 재설정이 필요함
3) 사회 전반에 만연된 엔진오일 관련 정보·인식 부족
▷ 국내 자동차사들이 신차·노후차량의 경우 엔진오일 교환주기를 앞당길 필요가 없다는 실험 결과가 있음에도 제대로 정보제공을 하지않아 사회 전반에 잘못된 정보·인식이 만연되어 있고, 소비자들이 불필요하게 엔진오일을 교환하거나 조기교환을 하게 하고 있음
▷ 또한 엔진오일을 빨리 자주 교환해주는 것과 엔진성능 향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엔진오일을 오래 사용하는 것과 환경오염과도 관계가 없으며, 연비(출력)와도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잘못된 인식은 사회 전반에 상당히 폭넓게 퍼져있음
▷ 엔진오일의 양이 부족할 때 보충만 하면 현재의 권장 교환주기(10,000㎞)보다 훨씬 많은 거리를 운행할 수 있음에도 소비자들은 정보부족으로 오일을 보충하지 않고 교환만 하고 있는 실정임
- 엔진오일 게이지가 Mini.(L)에 있을 때 약 1ℓ 오일을 보충하면 1/3은 교환한 것과 같기 때문에 보충을 하면 오래 사용할 수 있음
4) 사업자들의 빠른 오일 교환주기권장으로 연간 3,300억원 이상이 낭비
▷ 엔진오일 관련 사업자들의 짧은 엔진오일의 교환유도('97년 승용차평균 4회 엔진오일 교환)로 소비자에게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초래하는 외에도 자원낭비 및 환경오염 등으로 사회경제적인 부담도 증가
5) 엔진오일 교환 가격 결정에 소비자 영향력 미약
▷ 엔진오일 교환시 대부분 5가지를 일괄비용으로 계산하고 있어 소비자의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며, 가격의 투명성이 미약함
▷ 엔진오일 관련 상품은 소비자보다 정비업체가 최종 소비자가 되는 기형적인 시장구조로 되어 있어 정비업체가 소비자와 생산자 중간에서 가격이나 서비스의 질을 좌우하고 있어 소비자에게 불리
- 엔진오일 교환은 자동차관리법상 정비로 분류되어 있지 않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가 곤란하지만 일반정비의 시간당 공임 16,790원에 비춰 엔진오일 평균 교환비용 22,000원중 공임이 약 10,000원 정도 차지한다는 것은 과다한 공임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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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방안
1) 엔진오일 교환 주기의 합리적인 재설정 필요
⇒ 승용차 제조사는 취급(사용)설명서의 '가혹조건'을 해석이 분명해지도록 구체화하고, 검증이된 것 중심으로 재정리해야 해야 할 것임
⇒ 최소교환주기는 합리적으로 재설정해야 할 것이며, 최대교환주기는 외국 자동차들이나 수출용 차량과 같은 정도로 연장이 요구됨
2) 엔진오일 교환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권 보장
⇒ 국내시장에 낮은 등급의 엔진오일들이 유통되고 있는데 이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각 부분별로 분할해서 상품및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각 부분별 가격 별도 표시방법 시행요구
3) 승용차운전자들의 비용절감 노력과 의식전환 필요
⇒ 엔진오일은 필연적으로 자연 감소되므로 오래 사용하려면 주기적인 점검과 오일 보충의 습관화가 요구(보충용오일·보충용캔 휴대가 필요)
⇒ 자동차는 대개 엔진성능이 떨어지면 오일의 교환주기가 짧아질 수 있으므로 자동차 구입시 엔진오일 등 각종 오일의 교환주기를 비교·분석한 후 구매하는 경제적인 소비행위 추구
- 외국의 경우는 엔진오일의 교환주기가 짧으면 차량성능이 안좋은 것으로 소비자들이 판단하고 구입을 꺼림

2012년 4월 26일 목요일

최초의 정보 그리고 마지막 정보는 똑같다

  최초의 인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매우 독특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류가 최초에 어떻게 살았을 것인가는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최초의 인류는 현재와 같은 집도 없었으며,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식량의 저장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농업 역시 매우 제한적인 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마도 인류최초의 집단은 난해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살아야하지?라고 스스로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생존의 문제이다. 아마도 실제 사망률도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생존기간도 그렇게 길지 못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인류는 생존했고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그러면 이 정보의 시대라 일컬고 있는 지금 필자는 생각해본다. 인류 최초의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인류는 최초의 정보에 무엇을 담고 있었을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보의 홍수에 살아간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그 정보는 과연 다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은 왜 나오는 것일까? 밑도 끝도 나온다. TV, 인터넷, 신문 등에서 온통 정보뿐이다. 현대인은 눈뜨고 눈 감을 때까지 끊임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아마 꿈에서도 정보를 얻을 것이다.

  최초의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정보의 정체를 알아야한다. 정보의 핵심은 그 미디어들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쉽게 노출된다. 예를 들어 아침에 바쁜 일상의 현대인은 알람을 누르고 괴롭게 일어나고 허겁지겁 밥먹고 회사에 출근하고 그러다가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 소주에 삼겹살 그러다가 노래방,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 정도. 뭐 인생이 짜여진 각본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아주 철저하게 훈련받고 또 아주 충실하게 따른다. 이러한 정보들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정보들이다. 다시 말해서 진짜로 돈버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철저하게 소비하라는 것이다. 소비를 하면 누군가는 이익을 얻지 않을까? 이 사회의 누군가는 그러한 소비로 인해서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필자가 말한 "돈버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의 의미는 정보를 숨기고 있다가 올바른 표현이겠다. 따지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어떤 누가 돈버는 법을 그것도 모르는 대중에게 가르쳐주겠는가? 주식투자에서 유망주식을 말해도 그것이 진짜 정보인지 어쩐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짜 돈버는 정보는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이다. 아마도 가르쳐준다면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들 정도로 국한된다.

  이게 우리가 매일 같이 보고 듣는 정보의 실체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는 사회적으로 돈이라는 부분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 정보는 매우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 특성상.

  그러면 인류 최초의 정보는 어떠했을까? 인류의 최초정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에 뭐가 있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매년 무슨일이 발생하는지를 간파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추장이나 부족장이라 부른다. 실제로 현재도 초기 석기시대삶을 살아가는 부족에서도 부족장이 어느정도의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 그 정보는 광범위해서 주술행위도 포함된다. 주술행위를 잘 보면 그 속에도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다. 소비자가 되는 추장 아닌 사람들은 주술자체에 관해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추장이 주술을 해야할 시기라고 하면 작업들을 시작한다. 이 패턴 현대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가 이 글을 쓴 것은 파티의 법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정보의 제한과 폐쇄성은 그것이 해체되는 경우가 있는데 더 이상 그 정보가 유용하지 않을때이다. 파티의 법칙이란 파티에 갔더니 요즘 뭐가 좋더라 어떤 주식이 잘나가더라 등의 소문들은 지금 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난 정보란 것이다. 그것을 파티의 법칙이라 말한다.

  이미 해먹을 만큼 다 해먹은 상황에서 정보는 자기 과시일 뿐 실제적으로 고급정보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미디어에 속지말자. 속아선 안된다.















신승철, 에코소피, 서울, 솔.

매스미디어 시대는 대중의 소비와 유통과 결합된 TV매체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매스미디어는 대중의 잠재적 소비욕구를 자극하고, 문화산업을 통해서 생산된 문화상품을 소비하도록 강요했다. 대중의 삶은 매스미디어로 포위된다. 아침에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해주면서 공론의 장으로 인도하는 신문,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거나 여성들이 가사노동을 할 때 귀를 기울이게 하는 라디오, 노동을 마치고 여가시간에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TV, 주말에 찾게 되는 영화 등 매스미디어는 대중의 기호와 소통의 욕구를 충족하는 가십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대중은 그것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주체일 뿐 문화생산에 개입하거나 참여할 수 없다. 이 속에서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삶에서 생산되고,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조작하고 주입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소수의 문화생산자와 다수의 문화소비자는 지식인/대중이라는 모델과 같이 능동적인 소수정예의 전위적인 부위와 수동적이며 문화생산능력이 없는 후위부위인 대중의 이분법을 만들어낸다. 이 속에서 대중문화는 사람들의 삶 속에 있는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생산능력을 획일화시키고, 상품소비의 능력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일방적인 정보가 소비되는 과정에서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문화상품을 소비하면서, 그것의 허구적인 논리구조에 포섭되는 것이다. p. 189.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배아는 결국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배아가 인간이냐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이냐 부도덕한 것이냐. 이런 딜레마로는 아마 해결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도덕과 부도덕,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을 잘못 알고 있다.

  가령 배아 50개 있는 곳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3명정도 있었다고 했을때에 누구를 우선으로 구해야 할까? 50명인 사람? 아니면 지금 쓰러져있는 3명?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3명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배아50명이란 또 어떻게 해야한단말인가. 만일 소방관이 배아50명이 숫자가 더 많다며 쓰러진 3명을 구조에 소홀히 했을 경우에는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생명이란 숫자로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세포를 인간이라고 말해야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회적 동의도 없는 상황이다. 아마도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인간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많은 논란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배아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계속 진행될 것이다. 배아문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필자는 앞으로도 끝없이 진행될 사업에 있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더 건강하게 오래살고 싶어한다. 그 욕망에는 끝이 없는데 타인의 희생이 있더라도 인간은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어느나라에나 있는 장기매매는 그 욕망의 끝을 보여준다. 장기매매는 수요자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요자들은 매우 높은 위험을 감수하고 공급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찌르고 평생 살아가게 된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다 그 수요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높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말자.

  자 이제 어찌되었든 그러한 도덕적인 부분에서 일정 수준 혹은 아주 많은 부분 피할 수 있는 것이 나왔다.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것. 어찌되었든 인간이라고 말하기엔 분명 다소 그 세포를 변호하기엔 변호하는 쪽도 벅차고, 그 사업의 발전으로 가까운 내 가족이나 친구 등이 더 낳은 삶을 살아간다면 선뜻 인간이라고 동조하기도 어렵게 된다.

  아마도 그렇게 배아줄기세포는 인류의 더 낳은 삶을 위해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는 이 문제는 인간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 본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 그 욕망을 약간의 도덕적인 부분에서 결함이 다소 있더라고 반드시 하고야 말것이다.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도덕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한잔은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자의 죽음으로 마시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인간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살아간다면 아마도 인간의 희생 아래서 시작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2012년 4월 24일 화요일

마이클 샌델의 정의사회의 조건

  공리주의는 개인이 느끼는 기쁨이나 쾌락이 행복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정언명령에는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첫째는 보편적 법칙의 공식으로 당신의 의사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동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즉 행위의 준칙을 보편화함으로써 그것이 정언명령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준칙의 보편화는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타인의 그것보다 우선하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테스트다.

  정언명령의 두번째 공식은 목적으로서의 인간성의 공식으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 대해 당신의 인격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격이든 간에 인간성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나 살인, 자살은 모두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과학적 세계관이 발전하면서 목적론적 세계관이 쇠퇴하고 있다. p. 93.

  인간에게는 자유로운 의사나 선택뿐만 아니라 구성원의로서의 책무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나 공동체를 해석하고. 그 이야기가 구성원으로서의 책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이야기적인 좋은 삶을 고려하지 않고 정의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의를 생각할 때 도덕적 또는 종교적 문제를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p. 97.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과 세계 전체에 대한 목적론이다. p. 299.

  정의와 선을 연관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첫째, 정의의 원칙이란 특정 공동체나 전통에서 널리 공유되는 가치로부터 도덕적인 힘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공동체의 가치가 정의와 부정의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이 방법은 공동체주의적이다.
  둘째, 정의의 정당성은 그것이 만족시키는 도덕적 가치나 내제적인 선을 근거로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어떤 행위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중요한 인간의 선을 존중하거나 증진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p. 354.

  
 샌댈이 제기하는 선이 있는 정의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고전적인 정의의 개념이다. 그리스 시대 이래로 정의는 윤리성을 띠고 있었다. 이 개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고, 동양에서도 유교의 의는 윤리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정의는 어떤 의미에서든 윤리성을 띠는 것이 보편적이다. p. 373.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신과 도덕 사이에서

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신은 없다. 모든 종교는 틀렸다! 도킨스는 수많은 과학적 논증을 펼치며 신이 없음을 입증하고,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 그리고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다. '인간을 주목하라.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신에 대한 부정이 도덕적 타락과 연관될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신을 믿는 집단과 믿지 않는 집단간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즉,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자가 도덕적 타락에 빠진다는 과학적 근거 또한 없다.




이러한 논거를 주지하고 성서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파악해봐야한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행위를 한다. 신앙이라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자식을 죽음에 이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간다. 물론 아브라함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무슨 속마음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식이 제물로 받쳐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결코 쉽지 않는 문제이다. 기독교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순종이라고는 말하지만 일반적은 경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고 실제로 아브라함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설교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그것이 굉장히 인간을 원초적인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충분히 목사와 하나님을 대등하게 놓고 목사의 명령에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메세지를 던진다.




반면에 다른 논증도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가 정확하게 어느시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시절인 것은 확실하다. 자식을 번제의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한국에도 순장이 있었고, 인더스의 산맥에서는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받쳤다. 특히 심청전의 경우에도 사람이 제물이 되어서 바다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즉, 인간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아주 오래전에는 당연스럽게라고는 말하기에는 필자의 도덕적인 양심이 허락을 할 수 없으나, 어느정도 사회적인 용인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그 당시의 어느정도 용인되었던 시절임을 의미한다. 분명 성서에서도 이방종교인들이 번제를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종교적인 순응과 순종이라고 단적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분명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은 밝힌다. 너희가 악인이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음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마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사회적으로 허용된 형태에서 행동한 것이다. 자식을 바치는 행위가 어찌보면 도덕적인 행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최소한 그 사회가 그러한 번제를 용인한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다수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쓴다면 오히려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위험스러운 부분이다. 이제는 자식을 제물로 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회가 정해놓은 형벌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식의 생명을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는 사회가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사회적 법, 도덕, 종교 등이 부모의 모든 권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부모가 곧 법이고, 도덕임을 말한다.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신앙인이라는 전제를 놓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성서에서 아주 특별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완전 무결한 신앙인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그가 신의 명령을 받고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세상 모든 사람이 비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 자신은 옳바른 행위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쯤에서는 도덕이라는 존재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신에 의한 계명이 최고선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주고받고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무한의 축복을 내리는가하면 인간을 재앙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식을 번제에 받친 것은 아닐까. 신에게 자신의 신앙적인 부분을 증명해야했고,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킨 이유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 행해졌다고 말할 수 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한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 아닌 신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할 것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임은 아주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순수한 절대선이 될 수 없다. 성서가 밝히고 있듯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절대적 선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이 주장은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이기심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러한 논증은 도덕적인 옳고 그름보다 신에 의한 계명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때문에 이들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한 부류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신을 믿는 다는 부류가 믿지 않는 부류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논리적 근거는 아브라함를 중심에 놓더라도 논증할 수 없다. 그가 신앙적인 이유로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서의 중요한 10계명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말라. 등의 계명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법은 결코 앞선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최근에 여중생이 납치 및 성폭생으로 살인을 당하자 급하게 법을 재정비하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10계명으로는 살 수 없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살인도 정당방위가 존재한다. 그 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분화되어서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고 단순하게 살인하지말라라는 신의 계명은 지난 시절의 법이 된 것이다.

누가 더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에는 딱히 답을 내릴 수 없다. 분명 신을 믿는 부류에는 아주 극도의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성도들이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아브라함의 설교는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굉장한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고 자칫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카톨릭 스캔들 - 신이 되어버린 인간의 고독

   뇌과학으로 인해서 인간의 뇌에서 신을 만든다는 이론이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에서 80프로 이상은 시각적인 부분에 의존한다.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적인 정보를 보충해주는 역활을 한다. 물론 시각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임은 감각적인 정보는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증명해준다.


인간의 뇌가 신을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그려져야함이 마땅하나, 이 땅의 신의 형상은 수 없이 많다. 물론 신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인간이 그들을 신이라고 명명하고 신이 되었다. 누가 신의 형상을 만들었을까. 분명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만든 부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 짧은 글을 써본다.


요즘 카톨릭의 위기이다. 아동 성폭력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교황청까지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 CNN의 보도를 보면서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도 왠지 피해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성에 대해서 사회적인 감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인 성에 대한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힘이 무엇일까? 왜 또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 필요한 존재이든 그 반대이든 확실한 사실은 인간과 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신이 진짜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회에서 신의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마주대한다. 인간에게 있다고 믿어지는 속성에는 도덕성이 있다. 인간은 본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내재적 장치가 있는 듯 하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의 경우에도 그 죄책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해지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인간은 끊임없이 순수함과 순결함이라는 이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형수들은 사형을 받아들일때에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는 부류가 있고 그 반대로 자신은 끝까지 무죄임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전자는 사형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부류이고 반대는 자신의 도덕성을 끊없이 주장하는 부류이다. 어찌되었든 두 부류는 도덕성을 인정하는 증거이다. 사형수라는 극소수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도 그러한 도덕성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나 정도면 된다라고 믿고 살아간다. 즉, 모두가 다 순결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이 욕망이 혹시 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 순수함의 갈망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종교는 인간 세상에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신은 소수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맡고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고 심지어 입으로도 맛을 보아야 한다. 그만큼 일반 대중은 매우 가볍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다. 이성적 논리는 그렇게 잘 안통한다.


그렇다면 가장 손쉬운 대상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의 영역에 인간이 들어가면 된다. 집단에서 극소수의 인원을 신의 영역에 넣어버리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어버린다. 주변에 동식물과 태양 달 등을 신의 영역으로 넣을 수 있으나 그것들을 위한 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아마도 처음에는 주변의 것들을 신의 영역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인간이 지명한 신의 대리인이 되었다. 필자가 생각한 부분이 바로 지금의 영역이다. 누가 제사장을 했을까. 어찌되었든 누군가는 해야했을 것이다. 그사람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했다.


신의 대리인이 아닌 사람들은 일상의 삶에서 이제 자유를 얻을 수 있겠금 되었다.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인이 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제어하면서 대리적인 도덕적 행동에 만족해한다. 실제로 제사장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이지만 신의 대리인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중에게 보이는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대리인의 도덕적인 부분에 관해서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도적적인 부분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지금의 카톨릭도 유사하다. 우리는 종교의 수장에게 바라는 것은 끊없는 도덕적인 순수함과 순결함을 요구한다. 또 그렇게 바라고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스캔들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기대했던 도덕성이 훼손되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히 신의 영역에 남아야 자신들이 더욱 편하게 살수 있게된다. 그러나 어찌해야하나. 그들은 분명 신의 대리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다. 끊임없는 사회의 시선에서 피하고 싶지는 않을까. 차라리 밖에서 자신도 시선자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러한 시선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이들이 스캔들의 주인공들이라고 판단된다. 신의 대리인에서 내려오자니 밖에서 생산에 참여하기란 어찌보면 또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라고도 생각되니 이렇게 저렇게 쉽사리 못내려오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이라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들도 신을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태양이나 달등을 신으로 만들었지만, 신의 대리인 입장에서는 자신도 신을 만들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를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의 형상은 시대를 따라서 조금씩 변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의 대리인이 원하는 시선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종교적 성소에서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냥 위엄스럽게 존재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그렇게 감출 수 있다. 거의 모든 종교적 형상은 위엄과 근엄의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 그들은 종교적 성소에 들어오는 대중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고개를 숙이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단은 신의 대리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카톨릭의 어마어마한 높이와 웅장함의 건물들은 충분히 대중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중세에 건설된 카톨릭의 성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제가 대중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의 대리인은 이러한 점에 취약하다. 자신을 방어해줄 신의 형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대중의 시선을 잡아줄 수 있는 신의 형상의 부재는 목사뿐만 아니라 그 밑의 장로나 집사에게까지 시선처리가 되면서 덩달아 비난을 받기 쉽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도 신의 형상을 많이 허용한다. 목자의 의미를 담는 그림들이 그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거대화도 그것에 동참한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누군가는 부흥이라는 단어로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목사와 일동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거대화된 교회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수 많은 장식품들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목사가 설교할때에 그의 뒤를 장식하는 것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설교도중에 수없이 많은 시선과의 전쟁을 해야한다. "아 오늘은 뒤에 꽃이 이쁘게 피었구나", "금주의 교회활동", "화려한 조명", 심지어 지금은 빔프로젝트까지 정말 목사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게끔 되어있다.



신의 대리인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시선을 피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자신은 신이 아닌데 신처럼 살아야하는 운명이란 슬픈 현실이다. 일본의 천황제도도 그러한 구조이다. 영원히 신으로만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신이 아닌 한 개인을 영원히 대중의 시선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는 일을 안하기 때문에 편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의 고독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진짜로 일본의 천황은 그 자리에서 행복한 시선을 받고 있을까? 그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영국의 다이애나비의 터널사고는 시선에 대한 점에서 바라본다면 분명 답은 나온다.



카톨릭의 사제나 기독교의 목사나 누구랄 것도 없이 종교적인 속성에 대한 대변자는 모두 괴로운 위치에 있다. 대중이 그들에게 무한대의 신적인 인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은 더 편해지는 것이다. 신의 대리인은 형상을 만들면서 양쪽의 시선을 받는다. 형상과 인간과의 시선에서 고립되고 괴로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형상은 입은 있으나 말은 하지못하는 인형이고, 대중은 그들에게 신적인 언어를 구하기 때문에 인간과의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설령 인간과의 대화에서 인간적인 대화를 해버리면 자신의 위치가 깨지기 때문에 쉽사리 하지 못한다. 일반 대중처럼 편하게 말하면 뒤로가서는 호박씨를 심는 것이 또한 대중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신의 대린인은 이렇게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차라리 박물관의 유물품이 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리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영특한 신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있다. 우상을 만들지말라고 했던 신은 모든 비난에서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용은 이슬람국이 전쟁이라는 시선으로 신의 대리인들이 피하는 것과 마찮가지이다. 그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처럼 언제든지 비난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아주 잘 지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의 신의 대리인들은 다른 방법도 사용한다. 그것은 대중에게도 엄격한 신적인 삶을 요구하면서 금기의 삶으로 이끌어간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감시하는 체제로 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엄격한 자신의 시선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결국에는 제사장들에게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서 결국 화살이 대중에게 오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특징은 바로 신의 형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대상을 비난을 하는 것에 쉽게 노출된다.

유대교 이슬람교는 개인스스로에게 끊임없는 규율속에서 시선처리를 한다. 최근에 기독교도 시선의 처리에 굉장한 관심을 두고 있다. 기도의 시간을 중요하게끔 만드는 설교들, 예배의 참석에 두는 것들, 술을 마시지 말것, 담배를 피워서는 안될 것, 사실 규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굉장히 많은 제재들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위의 세가지의 종교는 약간은 극단적인 성향을 뛰게된다. 시선을 개인이 받아버리기 때문에 광신과 영적희열에서 구분하지를 못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의 광신자들은 신의 계명을 받고 비행기에 폭탄을 싫어서 수백명을 죽여도 도덕적 양심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유대교 또한 팔레스타인과의 땅싸움에서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시 제국주의 시절에 침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은 개인에게 그러한 규율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신의 대리인들이 시선처리를 아주 똑똑하게 잘 했기 때문이다. 부담이 없어진 카톨릭 신자들은 자신이 꼭 카톨릭임을 드러낼 필요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들은 분명 카톨릭신자라고 말할 수 있게된다. 왜냐하면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편안한 종교적 삶에서 이번 사제들의 스캔들은 아마도 충격이 컸나보다. 기대했던 것이 큰 만큼, 자신이 편안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한 만큼이나 충격은 크게되어있다. 카톨릭 사제들은 이 모든 비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위엄스럽고 강인한 신의 형상과의 대면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속 편할 것이다. 다시금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기에는 오늘밤에도 어떠한 여인을 생각하면서 성적인 욕망에 빠져야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건데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살아갔을까? 12명의 제자들이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3년간으로 추정되는 시간동안 제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은 한번도 없을까? 기독교적 교리에 의하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왔다고 한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존재인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받았을까.



그의 12제자는 모두 남성이다.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을까? 예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성적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라고말하면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글을 더 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화장실도 갔을텐데 부끄러워서 분명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만일 안했다면 분명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굉장히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것은 반드시 인간이 기록하기 마련이다. 식사는 어떠했을까. 생선을 먹었던 기록은 남아있다. 빵과 포도주도 남아있다. 그가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포도주이다. 그것도 아주 맛있는 포도주로 했다. 맛의 질감을 조절했다면 만일 맛없는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그 예식장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육신이기 때문에 아마도 신학적인 논리로 한다면 그는 누구의 시선도 받아서는 안된다. 그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에 시선의 주인이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에는 결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그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오직 두가지 부류에게만 시선처리가 되어있다.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령과 하나님이다. 오직 이 두 부류에게서만 시선을 받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트리니티(주삼위일체)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만 시선의 대상이 되면서 주체가 되는 존재이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버리면 이 구조가 깨져버린다. 신의 형상이 만들어져버리면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신의 형상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실제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있기를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고 말한다. 즉,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버리고 신의 존재는 거짓을 스스로 증명해버린다. 신의 형상은 신이 아님은 확실하다. 눈에 보이는 물체는 반드시 이땅에서 형태를 변형받는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형상은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시선을 받아야하고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까지도 천황이나 국왕을 만들어서 신적인 영역에 계속해서 포함할 것이다.


참으로 흥미있는 글이었다. 신의 형상이 많아지고 위엄스러울수록 대중은 더욱 편안한 종교적 삶을 영위하게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개인이 신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올때에 그가 주장했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랑이었다. 수 없이 많은 규율에서 벗어나 사랑을 외쳤고, 당연히 신의 시선을 율법을 통해서 직접 받고 있던 유대인에게는 굉장히 치욕스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을 빼버리면 그들의 시선을 잡아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에 속한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율법타파를 외친자를 죽여야만 신의 강력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타락의 시작은 순수함에서부터


    하나의  집단 구성원이 동질감을 느끼고 하나됨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공동의 적을 만들어서 그 적을 제거 할때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공동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이다.


   두번째의 방법은 쉽게 말해서 포용의 사랑을 의미한다. 즉,내부의 잘못된 구성원이나 특정한 사상이 있을 때에 그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노르웨이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에 그 당시의 총리는 정말 세기에 남을 많한 연설을 한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극우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상이라도 존중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면서 국민들에게 말했다.


   첫번째 방법은 주로 히틀러, 북한, 이명박 등 이러한 독재자들이 사용한다. 이러한 방법의 특징은 끊임없이 다른 세계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 이명박은 북한이 위험하기에 그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끊임없이 언론도 그와 함께 동조한다. 허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북한으로부터 죽는자와 밥을 못먹어서 죽어가는 노인, 어린이, 그리고 저소득계층과 의료시설을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비교해보자.  북한에 의해서 죽어가는 사람과 각종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한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죽는 사람이 많다.  북한은 위협이 아니라 만들어진 위협이다. 그들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은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말하는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공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관심사를 돌리게 하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부패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정치권력자가 요구하는 데로 북한이라는 한 국가를 심지어 가본적도 없는 국가를 이 나라의 위협이라고 끊임없이 선전하면서부터이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놓고 마치 공공의 적인 것처럼 말하고 동질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세히 교회설교를 보면 북한 이야가가 절반이고 이명박 찬양이 절반임을 쉽게 공감할 것이다. 그만큼 이명박 정부의 독재를 찬양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부터 진짜 할 이야기의 서두이다. 집단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두가지의 큰 예를 들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 특히 대한민국 기독교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는다. 진짜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경이 기록했듯이 교만은 파멸의 선봉장이라고 했다.


     진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대한민국 교회의 아주 웃기는 점은 분파된 교단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이름부터 시작한다. "순"이라는 차별성을 의미하는 단어를 복음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놓았다. 이렇게 분파된 교단이 많다는 점은 집단이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내부의 사랑하고 용인해야할 존재가 있을때에 집단이 오히려 건강해지는데 독재자들처럼 내부의 목사와 관련된 무슨 일이 있으면 거의 모든 교회가 분열을 하고 그 집단을 쫒아낸다. 그리고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야기와 사상을 결코 용인하지 못하는 집단인 것이다. 나와 다름을 전혀 용인하지 못한다. 특히 내부 고발자는 반드시 척결된다.


    결과적으로 남은 자와 떠나는 자 모두에게 가득차 있는 것은 "자신들의 순수함"이다. 가장 순수한 집단일 수록 내부의 포용해야할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그 어떠한 집단이 내부적으로 순수하다고 가득찬 상태에만 존재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터져버린다. 마치 화산처럼.


   한국 교회의 특수성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자신이 가장 순수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이 되어버리면서 비리나 부패적인 사항에서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되는 의견이 심각하게 충돌할 경우에 교회가 그것을 받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온갖 비리와 부정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야하고 외부의 적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 그것이 가장 간단하고 한국 사람들이 접근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도 북한과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기에 외부의 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인간은 알지 못하면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정말 무서운 공포란 대상을 알 지 못할때이다. 그러므로 북한 좋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에서의 문제점은 자신들만 순수하다고 믿는 그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들은 마치 이슬람의 극우적인 사람들처럼 언제든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교회의 모든 비리와 부정부패가 이를 증명한다. 분명 잘못된 일이며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내부에서 그러한 것을 고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지금은 북한이라는 나라와 경제적인 차이도 많이나고 북한 역시 전쟁이라는 것을 계획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하나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어서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젊은층은 더 그렇다. 그래서 최근의 교회 설교는 이슬람을 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건 나의 촉인데 분명 최근의 설교들은 이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포를 심어주고 있다.

 

공각기동대 - 누가 인간인가? Ghost in the shell

공각기동대 - 누가 인간인가? Ghost in the shell
 매트릭스 영화의 원작이다. 내용의 깊이는  결코 원작인 공각기동대의 끝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에는 따라가지를 못한다. 그만큼 영화 매트릭스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영화는 시각적인 효과가 더욱 중점을 두고 흥행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원작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전환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뇌까지 기계로 바꿔버리는 삶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이 애니의 주인공은 공각기동대의 대장이 아니다. 그녀는 조금은 초인적인 형태를 뛰는 캐릭터이다. 사실 공각기동대의 대장을 여성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난해하다. 기계가 된 존재에게 여성 남성이라는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애니의 진짜 주인공은 공각기동대의 로봇인 타코치마이다. 애니는 극적으로 이 타코치마가 영혼을 소유하는 과정을 지닌다.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타코치마가 부르는 이름은 신이었다. 하나님이었다. 난해하다. 인간은 기계가 되었고 기계로 만들어진 존재는 "하느사마"를 부르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누가 인간일까? 주제가의 내용에서도 실로 명가사나 나온다. "행복을 모르는 자는 행복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 문장은 타코치마에게 적용된다. 타코치마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존재를 위해서 죽음을 불사한다. 그리고 "하느사마"를 부른다. 눈물은 흐르고 신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기계가 되어버린 인간은 인간이 소유해야할 본질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애니를 보고서 인간의 조건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은 "신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이다.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영화 도가니와 기독교

실로 참담한 영화였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고개를 조아리게 되었고, 결국 눈물도 흐르게 되더군요.
그리고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고 이 나라의 기성세대가 어떠한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어떠한 집단보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과거는 분명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현재는 자신들의 우월성에 크게 도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전도하는 마음에는 전도를 받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의식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교만한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미래까지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반드시 사필귀정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영화 도가니에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그 사악함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 강하게 믿는 것인지 아무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가지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현실을 보여줬습니다.



마치 보통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합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의 저런 첨담한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또 우리의 위에서 우리를 이러한 식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있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일반 시민들의 부동산 문제에 얽힌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사회 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실제로 그러한 대통령인 노무현은 자살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영화 도가니를 바라보는 우리는 조금 더 낳은 삶인 것 같지만, 또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가장 큰 현실은 우리 일반 시민 역시 그러한 비참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밑바닥이라고 말하는 집단에 대한 문제가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회 전반이 그렇게 강자위주의 사회임을 증명하기 때문이죠.


독일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교육에서 아주 기본적인 것은 지나가는 장애인을 쳐다보아선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들과 우리의 현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깟 장애인의 삶의 향상을 위해서 과연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깟 밥 못먹는 아이들을 위해서 무상급식을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 돈으로 건설에 투자하고 4대강 하면 훨씬 더 사회 경제는 성공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가장 약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약자들 바로 위에 있는 집단이나 조직에 대해서도 보호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서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부류에 관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줬습니다. 장애우들이 꼭 약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분명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해서 많은 제약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사실은 일반적인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연습입니다. 선행이란 자주 해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애완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런 미친짓을 할바에 사람에게나 줄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부나 복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유기견이나 길고양이에게 작은 먹을 것을 주는 행위란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 마음을 실천하는 행동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복지에 관해서 전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단 한번도 이 사회에 봉사와 사랑을 나눈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도 헌신한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기부와 봉사하는 마음과 행동을 다 잃어버리고 이기심만 남은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면 오직 오만과 편견뿐이죠.

정말이지 도가니를 보면서 지금까지 기독교에 있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따지고보면 난 단한번도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회봉사에 가자는 말과 참여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진짜 관심은 오로지 대출받은 돈에 대한 이자와 땅투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구입한 땅에 가서 .......... 아무튼 그러했습니다. 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