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5일 수요일

배아는 결국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배아가 인간이냐 아니냐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이냐 부도덕한 것이냐. 이런 딜레마로는 아마 해결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도덕과 부도덕,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을 잘못 알고 있다.

  가령 배아 50개 있는 곳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3명정도 있었다고 했을때에 누구를 우선으로 구해야 할까? 50명인 사람? 아니면 지금 쓰러져있는 3명?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3명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배아50명이란 또 어떻게 해야한단말인가. 만일 소방관이 배아50명이 숫자가 더 많다며 쓰러진 3명을 구조에 소홀히 했을 경우에는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생명이란 숫자로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세포를 인간이라고 말해야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회적 동의도 없는 상황이다. 아마도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인간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많은 논란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배아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계속 진행될 것이다. 배아문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필자는 앞으로도 끝없이 진행될 사업에 있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더 건강하게 오래살고 싶어한다. 그 욕망에는 끝이 없는데 타인의 희생이 있더라도 인간은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어느나라에나 있는 장기매매는 그 욕망의 끝을 보여준다. 장기매매는 수요자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요자들은 매우 높은 위험을 감수하고 공급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찌르고 평생 살아가게 된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이 다 그 수요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높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말자.

  자 이제 어찌되었든 그러한 도덕적인 부분에서 일정 수준 혹은 아주 많은 부분 피할 수 있는 것이 나왔다.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것. 어찌되었든 인간이라고 말하기엔 분명 다소 그 세포를 변호하기엔 변호하는 쪽도 벅차고, 그 사업의 발전으로 가까운 내 가족이나 친구 등이 더 낳은 삶을 살아간다면 선뜻 인간이라고 동조하기도 어렵게 된다.

  아마도 그렇게 배아줄기세포는 인류의 더 낳은 삶을 위해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는 이 문제는 인간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 본다. 더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 그 욕망을 약간의 도덕적인 부분에서 결함이 다소 있더라고 반드시 하고야 말것이다. 사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도덕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한잔은 제3세계의 어린이 노동자의 죽음으로 마시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인간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살아간다면 아마도 인간의 희생 아래서 시작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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