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3일 목요일

신과 도덕 사이에서

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신은 없다. 모든 종교는 틀렸다! 도킨스는 수많은 과학적 논증을 펼치며 신이 없음을 입증하고,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 그리고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다. '인간을 주목하라.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신에 대한 부정이 도덕적 타락과 연관될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신을 믿는 집단과 믿지 않는 집단간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즉,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자가 도덕적 타락에 빠진다는 과학적 근거 또한 없다.




이러한 논거를 주지하고 성서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파악해봐야한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행위를 한다. 신앙이라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자식을 죽음에 이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간다. 물론 아브라함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무슨 속마음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식이 제물로 받쳐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결코 쉽지 않는 문제이다. 기독교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순종이라고는 말하지만 일반적은 경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고 실제로 아브라함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설교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그것이 굉장히 인간을 원초적인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충분히 목사와 하나님을 대등하게 놓고 목사의 명령에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메세지를 던진다.




반면에 다른 논증도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가 정확하게 어느시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시절인 것은 확실하다. 자식을 번제의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한국에도 순장이 있었고, 인더스의 산맥에서는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받쳤다. 특히 심청전의 경우에도 사람이 제물이 되어서 바다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즉, 인간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아주 오래전에는 당연스럽게라고는 말하기에는 필자의 도덕적인 양심이 허락을 할 수 없으나, 어느정도 사회적인 용인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그 당시의 어느정도 용인되었던 시절임을 의미한다. 분명 성서에서도 이방종교인들이 번제를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종교적인 순응과 순종이라고 단적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분명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은 밝힌다. 너희가 악인이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음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마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사회적으로 허용된 형태에서 행동한 것이다. 자식을 바치는 행위가 어찌보면 도덕적인 행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최소한 그 사회가 그러한 번제를 용인한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다수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쓴다면 오히려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위험스러운 부분이다. 이제는 자식을 제물로 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회가 정해놓은 형벌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식의 생명을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는 사회가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사회적 법, 도덕, 종교 등이 부모의 모든 권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부모가 곧 법이고, 도덕임을 말한다.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신앙인이라는 전제를 놓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성서에서 아주 특별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완전 무결한 신앙인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그가 신의 명령을 받고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세상 모든 사람이 비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 자신은 옳바른 행위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쯤에서는 도덕이라는 존재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신에 의한 계명이 최고선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주고받고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무한의 축복을 내리는가하면 인간을 재앙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식을 번제에 받친 것은 아닐까. 신에게 자신의 신앙적인 부분을 증명해야했고,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킨 이유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 행해졌다고 말할 수 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한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 아닌 신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할 것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임은 아주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순수한 절대선이 될 수 없다. 성서가 밝히고 있듯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절대적 선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이 주장은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이기심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러한 논증은 도덕적인 옳고 그름보다 신에 의한 계명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때문에 이들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한 부류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신을 믿는 다는 부류가 믿지 않는 부류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논리적 근거는 아브라함를 중심에 놓더라도 논증할 수 없다. 그가 신앙적인 이유로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서의 중요한 10계명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말라. 등의 계명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법은 결코 앞선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최근에 여중생이 납치 및 성폭생으로 살인을 당하자 급하게 법을 재정비하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10계명으로는 살 수 없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살인도 정당방위가 존재한다. 그 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분화되어서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고 단순하게 살인하지말라라는 신의 계명은 지난 시절의 법이 된 것이다.

누가 더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에는 딱히 답을 내릴 수 없다. 분명 신을 믿는 부류에는 아주 극도의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성도들이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아브라함의 설교는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굉장한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고 자칫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카톨릭 스캔들 - 신이 되어버린 인간의 고독

   뇌과학으로 인해서 인간의 뇌에서 신을 만든다는 이론이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에서 80프로 이상은 시각적인 부분에 의존한다.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적인 정보를 보충해주는 역활을 한다. 물론 시각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임은 감각적인 정보는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증명해준다.


인간의 뇌가 신을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그려져야함이 마땅하나, 이 땅의 신의 형상은 수 없이 많다. 물론 신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인간이 그들을 신이라고 명명하고 신이 되었다. 누가 신의 형상을 만들었을까. 분명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만든 부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 짧은 글을 써본다.


요즘 카톨릭의 위기이다. 아동 성폭력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교황청까지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 CNN의 보도를 보면서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도 왠지 피해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성에 대해서 사회적인 감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인 성에 대한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힘이 무엇일까? 왜 또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 필요한 존재이든 그 반대이든 확실한 사실은 인간과 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신이 진짜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회에서 신의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마주대한다. 인간에게 있다고 믿어지는 속성에는 도덕성이 있다. 인간은 본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내재적 장치가 있는 듯 하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의 경우에도 그 죄책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해지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인간은 끊임없이 순수함과 순결함이라는 이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형수들은 사형을 받아들일때에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는 부류가 있고 그 반대로 자신은 끝까지 무죄임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전자는 사형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부류이고 반대는 자신의 도덕성을 끊없이 주장하는 부류이다. 어찌되었든 두 부류는 도덕성을 인정하는 증거이다. 사형수라는 극소수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도 그러한 도덕성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나 정도면 된다라고 믿고 살아간다. 즉, 모두가 다 순결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이 욕망이 혹시 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 순수함의 갈망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종교는 인간 세상에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신은 소수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맡고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고 심지어 입으로도 맛을 보아야 한다. 그만큼 일반 대중은 매우 가볍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다. 이성적 논리는 그렇게 잘 안통한다.


그렇다면 가장 손쉬운 대상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의 영역에 인간이 들어가면 된다. 집단에서 극소수의 인원을 신의 영역에 넣어버리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어버린다. 주변에 동식물과 태양 달 등을 신의 영역으로 넣을 수 있으나 그것들을 위한 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아마도 처음에는 주변의 것들을 신의 영역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인간이 지명한 신의 대리인이 되었다. 필자가 생각한 부분이 바로 지금의 영역이다. 누가 제사장을 했을까. 어찌되었든 누군가는 해야했을 것이다. 그사람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했다.


신의 대리인이 아닌 사람들은 일상의 삶에서 이제 자유를 얻을 수 있겠금 되었다.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인이 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제어하면서 대리적인 도덕적 행동에 만족해한다. 실제로 제사장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이지만 신의 대리인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중에게 보이는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대리인의 도덕적인 부분에 관해서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도적적인 부분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지금의 카톨릭도 유사하다. 우리는 종교의 수장에게 바라는 것은 끊없는 도덕적인 순수함과 순결함을 요구한다. 또 그렇게 바라고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스캔들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기대했던 도덕성이 훼손되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히 신의 영역에 남아야 자신들이 더욱 편하게 살수 있게된다. 그러나 어찌해야하나. 그들은 분명 신의 대리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다. 끊임없는 사회의 시선에서 피하고 싶지는 않을까. 차라리 밖에서 자신도 시선자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러한 시선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이들이 스캔들의 주인공들이라고 판단된다. 신의 대리인에서 내려오자니 밖에서 생산에 참여하기란 어찌보면 또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라고도 생각되니 이렇게 저렇게 쉽사리 못내려오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이라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들도 신을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태양이나 달등을 신으로 만들었지만, 신의 대리인 입장에서는 자신도 신을 만들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를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의 형상은 시대를 따라서 조금씩 변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의 대리인이 원하는 시선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종교적 성소에서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냥 위엄스럽게 존재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그렇게 감출 수 있다. 거의 모든 종교적 형상은 위엄과 근엄의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 그들은 종교적 성소에 들어오는 대중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고개를 숙이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단은 신의 대리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카톨릭의 어마어마한 높이와 웅장함의 건물들은 충분히 대중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중세에 건설된 카톨릭의 성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제가 대중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의 대리인은 이러한 점에 취약하다. 자신을 방어해줄 신의 형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대중의 시선을 잡아줄 수 있는 신의 형상의 부재는 목사뿐만 아니라 그 밑의 장로나 집사에게까지 시선처리가 되면서 덩달아 비난을 받기 쉽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도 신의 형상을 많이 허용한다. 목자의 의미를 담는 그림들이 그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거대화도 그것에 동참한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누군가는 부흥이라는 단어로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목사와 일동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거대화된 교회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수 많은 장식품들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목사가 설교할때에 그의 뒤를 장식하는 것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설교도중에 수없이 많은 시선과의 전쟁을 해야한다. "아 오늘은 뒤에 꽃이 이쁘게 피었구나", "금주의 교회활동", "화려한 조명", 심지어 지금은 빔프로젝트까지 정말 목사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게끔 되어있다.



신의 대리인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시선을 피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자신은 신이 아닌데 신처럼 살아야하는 운명이란 슬픈 현실이다. 일본의 천황제도도 그러한 구조이다. 영원히 신으로만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신이 아닌 한 개인을 영원히 대중의 시선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는 일을 안하기 때문에 편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의 고독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진짜로 일본의 천황은 그 자리에서 행복한 시선을 받고 있을까? 그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영국의 다이애나비의 터널사고는 시선에 대한 점에서 바라본다면 분명 답은 나온다.



카톨릭의 사제나 기독교의 목사나 누구랄 것도 없이 종교적인 속성에 대한 대변자는 모두 괴로운 위치에 있다. 대중이 그들에게 무한대의 신적인 인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은 더 편해지는 것이다. 신의 대리인은 형상을 만들면서 양쪽의 시선을 받는다. 형상과 인간과의 시선에서 고립되고 괴로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형상은 입은 있으나 말은 하지못하는 인형이고, 대중은 그들에게 신적인 언어를 구하기 때문에 인간과의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설령 인간과의 대화에서 인간적인 대화를 해버리면 자신의 위치가 깨지기 때문에 쉽사리 하지 못한다. 일반 대중처럼 편하게 말하면 뒤로가서는 호박씨를 심는 것이 또한 대중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신의 대린인은 이렇게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차라리 박물관의 유물품이 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리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영특한 신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있다. 우상을 만들지말라고 했던 신은 모든 비난에서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용은 이슬람국이 전쟁이라는 시선으로 신의 대리인들이 피하는 것과 마찮가지이다. 그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처럼 언제든지 비난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아주 잘 지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의 신의 대리인들은 다른 방법도 사용한다. 그것은 대중에게도 엄격한 신적인 삶을 요구하면서 금기의 삶으로 이끌어간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감시하는 체제로 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엄격한 자신의 시선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결국에는 제사장들에게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서 결국 화살이 대중에게 오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특징은 바로 신의 형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대상을 비난을 하는 것에 쉽게 노출된다.

유대교 이슬람교는 개인스스로에게 끊임없는 규율속에서 시선처리를 한다. 최근에 기독교도 시선의 처리에 굉장한 관심을 두고 있다. 기도의 시간을 중요하게끔 만드는 설교들, 예배의 참석에 두는 것들, 술을 마시지 말것, 담배를 피워서는 안될 것, 사실 규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굉장히 많은 제재들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위의 세가지의 종교는 약간은 극단적인 성향을 뛰게된다. 시선을 개인이 받아버리기 때문에 광신과 영적희열에서 구분하지를 못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의 광신자들은 신의 계명을 받고 비행기에 폭탄을 싫어서 수백명을 죽여도 도덕적 양심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유대교 또한 팔레스타인과의 땅싸움에서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시 제국주의 시절에 침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은 개인에게 그러한 규율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신의 대리인들이 시선처리를 아주 똑똑하게 잘 했기 때문이다. 부담이 없어진 카톨릭 신자들은 자신이 꼭 카톨릭임을 드러낼 필요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들은 분명 카톨릭신자라고 말할 수 있게된다. 왜냐하면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편안한 종교적 삶에서 이번 사제들의 스캔들은 아마도 충격이 컸나보다. 기대했던 것이 큰 만큼, 자신이 편안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한 만큼이나 충격은 크게되어있다. 카톨릭 사제들은 이 모든 비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위엄스럽고 강인한 신의 형상과의 대면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속 편할 것이다. 다시금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기에는 오늘밤에도 어떠한 여인을 생각하면서 성적인 욕망에 빠져야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건데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살아갔을까? 12명의 제자들이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3년간으로 추정되는 시간동안 제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은 한번도 없을까? 기독교적 교리에 의하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왔다고 한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존재인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받았을까.



그의 12제자는 모두 남성이다.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을까? 예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성적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라고말하면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글을 더 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화장실도 갔을텐데 부끄러워서 분명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만일 안했다면 분명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굉장히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것은 반드시 인간이 기록하기 마련이다. 식사는 어떠했을까. 생선을 먹었던 기록은 남아있다. 빵과 포도주도 남아있다. 그가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포도주이다. 그것도 아주 맛있는 포도주로 했다. 맛의 질감을 조절했다면 만일 맛없는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그 예식장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육신이기 때문에 아마도 신학적인 논리로 한다면 그는 누구의 시선도 받아서는 안된다. 그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에 시선의 주인이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에는 결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그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오직 두가지 부류에게만 시선처리가 되어있다.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령과 하나님이다. 오직 이 두 부류에게서만 시선을 받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트리니티(주삼위일체)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만 시선의 대상이 되면서 주체가 되는 존재이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버리면 이 구조가 깨져버린다. 신의 형상이 만들어져버리면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신의 형상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실제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있기를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고 말한다. 즉,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버리고 신의 존재는 거짓을 스스로 증명해버린다. 신의 형상은 신이 아님은 확실하다. 눈에 보이는 물체는 반드시 이땅에서 형태를 변형받는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형상은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시선을 받아야하고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까지도 천황이나 국왕을 만들어서 신적인 영역에 계속해서 포함할 것이다.


참으로 흥미있는 글이었다. 신의 형상이 많아지고 위엄스러울수록 대중은 더욱 편안한 종교적 삶을 영위하게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개인이 신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올때에 그가 주장했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랑이었다. 수 없이 많은 규율에서 벗어나 사랑을 외쳤고, 당연히 신의 시선을 율법을 통해서 직접 받고 있던 유대인에게는 굉장히 치욕스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을 빼버리면 그들의 시선을 잡아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에 속한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율법타파를 외친자를 죽여야만 신의 강력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타락의 시작은 순수함에서부터


    하나의  집단 구성원이 동질감을 느끼고 하나됨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공동의 적을 만들어서 그 적을 제거 할때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공동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이다.


   두번째의 방법은 쉽게 말해서 포용의 사랑을 의미한다. 즉,내부의 잘못된 구성원이나 특정한 사상이 있을 때에 그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노르웨이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에 그 당시의 총리는 정말 세기에 남을 많한 연설을 한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극우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상이라도 존중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면서 국민들에게 말했다.


   첫번째 방법은 주로 히틀러, 북한, 이명박 등 이러한 독재자들이 사용한다. 이러한 방법의 특징은 끊임없이 다른 세계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 이명박은 북한이 위험하기에 그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끊임없이 언론도 그와 함께 동조한다. 허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북한으로부터 죽는자와 밥을 못먹어서 죽어가는 노인, 어린이, 그리고 저소득계층과 의료시설을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지 비교해보자.  북한에 의해서 죽어가는 사람과 각종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한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죽는 사람이 많다.  북한은 위협이 아니라 만들어진 위협이다. 그들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은 복지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말하는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공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관심사를 돌리게 하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부패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정치권력자가 요구하는 데로 북한이라는 한 국가를 심지어 가본적도 없는 국가를 이 나라의 위협이라고 끊임없이 선전하면서부터이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놓고 마치 공공의 적인 것처럼 말하고 동질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세히 교회설교를 보면 북한 이야가가 절반이고 이명박 찬양이 절반임을 쉽게 공감할 것이다. 그만큼 이명박 정부의 독재를 찬양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부터 진짜 할 이야기의 서두이다. 집단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두가지의 큰 예를 들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 특히 대한민국 기독교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는다. 진짜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경이 기록했듯이 교만은 파멸의 선봉장이라고 했다.


     진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대한민국 교회의 아주 웃기는 점은 분파된 교단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이름부터 시작한다. "순"이라는 차별성을 의미하는 단어를 복음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놓았다. 이렇게 분파된 교단이 많다는 점은 집단이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내부의 사랑하고 용인해야할 존재가 있을때에 집단이 오히려 건강해지는데 독재자들처럼 내부의 목사와 관련된 무슨 일이 있으면 거의 모든 교회가 분열을 하고 그 집단을 쫒아낸다. 그리고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이야기와 사상을 결코 용인하지 못하는 집단인 것이다. 나와 다름을 전혀 용인하지 못한다. 특히 내부 고발자는 반드시 척결된다.


    결과적으로 남은 자와 떠나는 자 모두에게 가득차 있는 것은 "자신들의 순수함"이다. 가장 순수한 집단일 수록 내부의 포용해야할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그 어떠한 집단이 내부적으로 순수하다고 가득찬 상태에만 존재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터져버린다. 마치 화산처럼.


   한국 교회의 특수성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자신이 가장 순수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이 되어버리면서 비리나 부패적인 사항에서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되는 의견이 심각하게 충돌할 경우에 교회가 그것을 받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온갖 비리와 부정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야하고 외부의 적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 그것이 가장 간단하고 한국 사람들이 접근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도 북한과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기에 외부의 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인간은 알지 못하면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정말 무서운 공포란 대상을 알 지 못할때이다. 그러므로 북한 좋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에서의 문제점은 자신들만 순수하다고 믿는 그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들은 마치 이슬람의 극우적인 사람들처럼 언제든지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교회의 모든 비리와 부정부패가 이를 증명한다. 분명 잘못된 일이며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내부에서 그러한 것을 고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지금은 북한이라는 나라와 경제적인 차이도 많이나고 북한 역시 전쟁이라는 것을 계획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하나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어서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히 젊은층은 더 그렇다. 그래서 최근의 교회 설교는 이슬람을 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건 나의 촉인데 분명 최근의 설교들은 이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포를 심어주고 있다.

 

공각기동대 - 누가 인간인가? Ghost in the shell

공각기동대 - 누가 인간인가? Ghost in the shell
 매트릭스 영화의 원작이다. 내용의 깊이는  결코 원작인 공각기동대의 끝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에는 따라가지를 못한다. 그만큼 영화 매트릭스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영화는 시각적인 효과가 더욱 중점을 두고 흥행에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원작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전환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이 담겨있다는 뇌까지 기계로 바꿔버리는 삶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이 애니의 주인공은 공각기동대의 대장이 아니다. 그녀는 조금은 초인적인 형태를 뛰는 캐릭터이다. 사실 공각기동대의 대장을 여성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난해하다. 기계가 된 존재에게 여성 남성이라는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애니의 진짜 주인공은 공각기동대의 로봇인 타코치마이다. 애니는 극적으로 이 타코치마가 영혼을 소유하는 과정을 지닌다.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타코치마가 부르는 이름은 신이었다. 하나님이었다. 난해하다. 인간은 기계가 되었고 기계로 만들어진 존재는 "하느사마"를 부르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누가 인간일까? 주제가의 내용에서도 실로 명가사나 나온다. "행복을 모르는 자는 행복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 문장은 타코치마에게 적용된다. 타코치마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존재를 위해서 죽음을 불사한다. 그리고 "하느사마"를 부른다. 눈물은 흐르고 신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기계가 되어버린 인간은 인간이 소유해야할 본질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애니를 보고서 인간의 조건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은 "신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이다.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영화 도가니와 기독교

실로 참담한 영화였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고개를 조아리게 되었고, 결국 눈물도 흐르게 되더군요.
그리고 기독교라는 가면을 쓰고 이 나라의 기성세대가 어떠한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어떠한 집단보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과거는 분명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현재는 자신들의 우월성에 크게 도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전도하는 마음에는 전도를 받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의식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교만한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미래까지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반드시 사필귀정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영화 도가니에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그 사악함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 강하게 믿는 것인지 아무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가지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현실을 보여줬습니다.



마치 보통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합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의 저런 첨담한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또 우리의 위에서 우리를 이러한 식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있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 일반 시민들의 부동산 문제에 얽힌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사회 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실제로 그러한 대통령인 노무현은 자살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영화 도가니를 바라보는 우리는 조금 더 낳은 삶인 것 같지만, 또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가장 큰 현실은 우리 일반 시민 역시 그러한 비참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밑바닥이라고 말하는 집단에 대한 문제가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회 전반이 그렇게 강자위주의 사회임을 증명하기 때문이죠.


독일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교육에서 아주 기본적인 것은 지나가는 장애인을 쳐다보아선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들과 우리의 현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깟 장애인의 삶의 향상을 위해서 과연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깟 밥 못먹는 아이들을 위해서 무상급식을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 돈으로 건설에 투자하고 4대강 하면 훨씬 더 사회 경제는 성공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가장 약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약자들 바로 위에 있는 집단이나 조직에 대해서도 보호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서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부류에 관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줬습니다. 장애우들이 꼭 약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분명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들에 비해서 많은 제약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사실은 일반적인 우리가 보호받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연습입니다. 선행이란 자주 해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을 조금씩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애완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런 미친짓을 할바에 사람에게나 줄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부나 복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유기견이나 길고양이에게 작은 먹을 것을 주는 행위란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고 그 마음을 실천하는 행동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복지에 관해서 전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단 한번도 이 사회에 봉사와 사랑을 나눈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도 헌신한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기부와 봉사하는 마음과 행동을 다 잃어버리고 이기심만 남은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면 오직 오만과 편견뿐이죠.

정말이지 도가니를 보면서 지금까지 기독교에 있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따지고보면 난 단한번도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회봉사에 가자는 말과 참여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진짜 관심은 오로지 대출받은 돈에 대한 이자와 땅투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구입한 땅에 가서 .......... 아무튼 그러했습니다. 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 광신의 시작

교회에서 흔히 하는 문장이 "기도하면 다 됩니다"이다.
아마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거나 교회에 어떻게든 연관이 있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문장이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왠지 모르게 자극적이고 충동적이라는 느낌이 묻어있다.
이러한 문장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현실에 대한 분명한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같은 문장과 비슷한 말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들었을 경우에 쇄뇌를 당한다.
이들을 목사가 이용했을 경우에는 정말이지 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교회의 신축건물과 관련된 부분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대출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을 때에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도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당신이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와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결론은 위의 두 문장은 사실 둘다 거짓이다.
그 누구도 기도해서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은 없고, 공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결코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패배주의일까?
그렇지 않다.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가장 먼저 생각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한 운명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더 겸손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죽음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현실을 깨닫고나면 조금은 떨리기도한다. 때로는 내가 벌써부터 죽음이라는 아주 멀리 있을 것 같은 시기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시기상조가 아닌가라고 내 자신에게 묻는다.



아주 오래전에 나의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너의 할아버지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고 믿어지냐?
나는 그때 안믿어진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인생이 얼마나 빠른가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또한 흘러갈 것을...괜히 우리 인간의 힘으로 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는가...
영원히 젊을 것 같은 시기도 흘러가고 그것을 막으려고 성형과 온갖 염색...
그렇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나이들어감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따라서 기도하면 다 됩니다라는 문장을 조금은 수정해야 한다.
예수님도 기도했지만 십자가에 올라갔습니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예수님도 괴롭고 힘들어했습니다.
당신이라고 예수님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고 믿습니까?...



이렇게 하면 조금 진실에 가까워진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네가 이득을 보는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동안 머리를 스쳐가면서 생각하게 했던 대사였다.

맘마미아가 가르쳐주는 즐거운 인생

 
 
즐거운 인생, 그것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이고 도착점이 아닐까.
 
 
천국도 우리의 즐거운 인생의 도착점이다. 그곳에 도착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의 삶이 불행하거나 괴로움도 정당화될 수 없다. 기독교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천국은 분명 최종적인 관문이지만 이 땅의 삶이 행복하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맘마미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즐거운 인생이다. 즐겁게~!

웃음과 진리 -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보고

냉철한 지성의 판단과 깊이가 없이 이루어지는 진리의 행위는 위험하다. 더욱이 진리라고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죽음까지도 미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동에서 이루어지는 수 없이 많은 자살폭탄들은 그 진리의 거짓진 포장으로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자살 폭탄은 일제시대에서도 이루어졌다. 우리가 하면 로맨스이고 그들이 하면 불륜인가.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진리가 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하고도 깊은 지성이 요구된다.


이와 비슷한 형태가 예수님을 믿으라는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는 구호이다. 이러한 표어가 문제가 되는 것은 무분별한 진리의 남용이다. 우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 어떠한 누구도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고, 이 땅에서 인간의 죄를 가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신 분이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기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동일하게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대한 흐려진 판단이 광신을 낳게 하는 것이다. 모든 자들이 십자가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나, "불신지옥 예수천국"은 동일한 관점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예수를 믿는 나는 그러한 구호를 볼 때마다 웃어버린다. 정말이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웃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렇게 진리라고 빡빡 우기는 모든 것들에게 웃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웃음으로 그들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같이 감정이 상해서 싸운다면 그들은 더욱 그 진리로 무장을 할 것이다. 그들을 그 진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웃음의 힘이다. 결국 웃음이 진리는 되지는 못하더라도 또 다시 "이것이 진리이다, 혹은 저것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은 수치스러워하지 말지어다

YOU DID NOT BEAR THE SHAME
YOU RESISTED
SACRIFICING YOUR LIFE
FOR FREEDOM, JUSTICE AND HONOR

- FROM THE GERMAN RESISTANCE MEMORIAL, BERLIN



이명박에게 아부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의 목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글이라 생각한다. 광우병 사건으로 수 많은 국민들이 견해를 제시했을 때에 대통령에게 아부했던 목사는 뭐라고 했던가.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던 자들에게 사탄의 무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킬 것도 없는 자들은 위에 써있는 글을 성경보다 더 많이 읽기를 권한다.

문화와 종교

인간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날아가는 새가 새똥을 싼 것과 내가 벤치에 앉아 있던 것은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으며, 두 사건이 우연히 연결되어 내가 새똥에 맞는 일이 발생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고 사건의 경중에 따라 이러한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재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규칙적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통 종교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따라서 종교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다른’ 더 높은 현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지닌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집단적으로 종교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개인적 신앙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개인적인 종교는 없다. 종교 의식은 노래, 기도, 춤, 의식을 수반하는데, 이런 과정은 한 공동체에 속한 신도들 간의 결속과 개인의 소속감을 강화시켜준다. 종교 활동은 한 개인이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존경을 표할 수 있게 한다. 숭배, 제물, 의식 또는 기도를 통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와 접촉하려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 절대적 존재의 보호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존재에 대한 공포감에 기인한 것이다.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경험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초월’하여 영적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높은 세계라는 개념은 흔히 개인적 차원에서 인지되며, 신과 관련이 있다. 종교는 존재-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속에 스며들어 그들에게 어떤 목적의식을 부여한다.
 

이러한 종교적 감정은 ‘경외감’과 ‘보호받는 느낌’가운데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종교적 감정은 상충하는 면이 있다. 종교에서는 신성한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믿으며, 개인은 그 존재를 숭배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완전해지는 기분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은 이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 기도, 종교 의식은 사람들은 신성한 힘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그래서 그 존재로부터 보호를 받고 지침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종교에서, 신을 비롯한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는 윤리적 행도의 지침을 주기도 한다. 그런 신성한 계율은 인간들을 이끌고 지도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계율로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순리는 죽음이라는 명제이다. 때문에 죽은 자들을 매장하고 추모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종교 행위에 속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종교적 믿음의 한 부분을 이루어왔다. 많은 종교들이 사람은 죽으면 심판을 받아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나뉜다고 믿는다. 죽음 이후의 삶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 했던 행동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많은 종교들은 생각한다.
 

죽음은 개인적인 경험 이상의 문제이다. 인류학자들은 삶의 집단적 성격을 보여주는 관점에서 죽음을 연구해 왔다. 브로니스로 마리노스키Bronislaw Malinowski같은 인류학의 개척자들은 죽음을 모든 종교의 기원으로 보았다. 그가 마술과 과학, 종교 사이에 그어 놓은 경계선은 이 점을 확신하게 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모든 문화의 시원이라고 보고 있다. 죽음에 관해서는 고고학자들도 인류학자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중개인들이다. 죽은 자의 시신을 대상으로 행하는 의식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미개한 유인원 상태에서 점차 진화하여 지금과 같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를 고고학 기록에서 보게 된다. 장례에 대한 관심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동료 인간이 시신을 먹는 물리적 공격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관심은 지성과 존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야만적인 동물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죽음은 두 개의 모호한 얼굴을 - 때로는 유용하겠지만 -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죽음의 계곡을 걷는다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는 역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의식해야 된다.
 

죽음, 즉 무덤 앞의 묘비와 관 속의 사망자 발 위에 놓인 대석이 상징하는 죽음은 인간 조건의 양극인 탄생과 사망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는 영역이다. 죽음이란 말은 세계적으로 어느 문화에서든 기피하는 대화 소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대화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므로 질서의 파괴자일 뿐이다. 죽음을 좀더 정확한 말로 표현하면 당신은 ‘잠재적으로 최고의 건강 유지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혹은 ‘마지막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했다’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레이미족은 ‘고추농사 지으러 가버렸다’는 부재의 표현으로 죽음을 암시하고 또 알래스카의 트링기트족은 ‘숲으로 가버렸다’고 표현한다. 말레이어 사전에는 회교도의 죽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지만 짐승이나 이교도의 죽음에 사용하는 ‘멤푸스mampus’를 문화적으로 통찰력 있게 분류시켜 놓았다. 모든 죽음을 가리키는 보편적 어휘는 아직 없지만 우리의 언어에는 특별한 유형의 죽음을 지칭하는 어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는 하나의 문화권의 특징을 구별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서구중심의 역사관은 인류가 쌓아놓은 문화적인 흔적들을 소멸시키고 있다. 에릭 울프의 『유럽과 역사가 없는 사람들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비서구 사람들, 특히 오지의 원주민들은 세계사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온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학문적 편협함을 벗어나 지금까지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지평 위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들에게도 역사를 움직여가는 주체로서의 되돌려주고자 하는 연구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유럽이 아닌 지역의 종교적인 회복은 넓게 본다면 편협적인 역사기록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탈식민의 원석이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김영수,『동남아의 종교와 사회』, 오름, 2001.
니겔 발리, 『죽음의 얼굴』, 고양성 역, 예문, 2001.
말리노우스키, 『원시신화론』, 서영대 역, 민속원, 2001.
발터 하이시히, 『몽골의 종교』, 이평래 역, 소나무, 2003.
월터 캡스, 『현대종교학 담론』, 김종서 역, 까치, 1999.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일조각, 2007.
한국문화인류학회, 『낯선곳에서 나를 만나다』, 일조각, 2006.

이명박과 기독교의 광신

   인간의 수 없이 많은 조건에는 영원한 것에 대한 사모함이 있다. 그 영원의 추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제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죽어도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바램은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등과 같은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무덤에 생전에 살았던 것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생전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부를 포기하기 싫은 인간은 그러한 거대한 무덤을 형태로 영원한 세계를 그렸다.
이렇게 사회의 고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이 되거나 거짓의 신을 만들어서 밑의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지배의 이념을 전파한다. 그리고 무덤을 건설하면서 혹은 신전을 건설하면서 노동력을 사용한다. 즉 보이지 않는 권력을 보이겠끔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왕이 새롭게 즉위하거나 대통령이 당선되면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끝없는 광신이 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또 다른 경우가 하나 있다. 밑에서부터 나타나는 광신이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기 때문에 부와 권력 세상의 모든 것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부와 재산의 무분별한 파괴를 사회적 정의와 청빈으로 오해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권력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처단하기를 바라는 논리를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친서민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점퍼를 입고 모내기를 하고, 시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오뎅을 먹는 등의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늬만 친서민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노무현은 아예 농부가 되겠다고 작정을 한 것에 비해서 이명박은 마치 세상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시장과 농토를 이동하면 마치 국가의 어른이 온 것처럼 되어서 대한민국의 시민은 없어지고 백성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도 이명박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로또 당청은 아니지만"이라고 하면서 마치 왕이 통치하는 시절에 왕궁밖을 나가서 은혜를 베푸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모습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없는 그져 내 배만 부르게 해주라는 우매한 대중은 또 좋다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광신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대통령이 우리를 먹여 살릴 것이다는 구호와 그가 아주 예전에 박정희 독재자와 비슷한 성격이고 비약적인 경계발전을 이룰 것이라는 광신적인 태도가 이명박을 신의 위치에 놓고 우리는 그의 신전을 건축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믿는 교회도 이명박이라는 장로가 대통령이라는 이유 하나만 어떠한 비판도 없는 성경에 있는 인물과 비교하면서 신성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광신은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든 사람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광신 또한 가능한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신앙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신앙의 구체화를 위해서 광신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운하는 이명박이 원했던 정책인가 아니면 우리 우매한 대중이 만들어 놓은 광신의 결과인가?! 결국 광신도가 있기 때문에 신전은 계속 건축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정책들은 인간의 신앙을 자극할 것이다. 그때마다 광신도가 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 그만아니겠는가.
그 광신의 결과를 불교에서 보라. 가면 갈수록 커지는 불상들과 더욱 화려해지는 것들을 보면 그 언젠가 우리 인간 스스로 망치로 조각내버리는 순간이 올것이라 믿는다. 교회의 정말이지 커다란 십자가처럼 말이다. 누가 그 십자가에 망치로 예수님을 못 박았는가? 우리 인간이 그러했다. 예수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자 모든 인간은 믿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상과 상상이 현실화되어 있는 생육신이신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광신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신앙과 광신의 차이점이다.

인간은 소변과 대변 때문에 신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소변과 대변 때문에 신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삶에서 나름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세계관은 인간의 얄팍한 이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가벼운 배움에서 나타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세계관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관한 설명처럼 자신이 믿는 그것은 실제가 파악되지 않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불교의 석가든, 혹은 그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관한 비판과 의심이 없다. 기독교도 여기서는 동일하다.

  자신의 내적 비판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은 광신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신의 이름이라는 이유로, 혹은 신의 영광이라는 이유로, 그 밖에 은혜라는 이유로,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지 주변의 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막대한 대출을 받아서 지어진 교회는 고스란히 성도들의 평생의 짐으로 적용되고 교회의 질적인 성장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전도는 뒷전에 밀려있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목사라는 한 인간을 신격화 시켜서 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또한 대통령이 장로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회적인 발언 한번 못하는 충성된 개가 되어 있다.


  기독교가 카톨릭의 맹목적인 광신의 비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신의 뜻을 잘 이루기 위해서는 내적 비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한다. 내적비판은 회의와 토론 그리고 대화와 타협이다. 인간은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뜻을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소변과 대변을 처리해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아무리 위대한 사회적 위치에 올라가고 또 신과 대항할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이루어 놓은 완벽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우리 인간은 화장실을 가야한다. 그리고 내가 인간임을 깨닫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생리현상 앞에서 우리는 최고의 치장과 다이아가 있더라도 그곳에서는 늘 혼자이다. 아무리 완벽하고 순수함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소변과 대변 앞에서 저항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 자신을 정화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잠시 대통령이라는 놀이를 그만두고 신이 뜻이 무엇인가를 깊게 고민해야 한다. 신의 뜻이라는 이유로 국민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신의 대리자가 되려는 오만한 자들은 이제 화장실을 가야할 때이다. 그곳에서 내가 인간임을 깨닫기 바란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완고한 믿음이 곧 증거이기 때문이다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신의 존재를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이 인간에게 주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신비스러운 현상으로는 신의 존재를 납득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세계는 어떤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스러운 현상으로 그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분명 정신이상자이거나 이단이다.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고 그와 그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사랑 그것이 신의 핵심이다. 사랑에 과학과 논리가 필요하던가. 어쩌면 이 시대의 신학이 시대의 요청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신을 인간과의 객체의 자리에 놓고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신학 관련된 책이 있으나 신은 어디까지나 객체화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신은 항상 저 위에 존재하고 인간은 아래서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1Q84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간절한 바람이 진짜 리얼을 만들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도덕적이야 하는가?

도덕과 종교의 상관관계에 관해서 생각해보았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필자는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겠다. 과연 신에 대한 믿음이 도덕을 위한 충분조건인가 아니면 필요조건인가라는 명제를 고민한 것이다.


아마도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은 신의 의지가 신에 대한 모든 믿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신의 의지로 환원되는 도덕의 당위 타당성도 믿음과 독립적이라는 견해를 당연히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결론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견해로부터 도덕과 도덕의 당위성을 이해하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러한 이해의 가능성으로부터 제외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 사람이 정말로 도덕적인가라는 명제를 재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에 한명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판단해봐야 한다. 자식을 죽이는 행위가 신의 명령으로 정당화된다. 게다가 성서에는 아브라함의 그 어떠한 도덕적인 딜레마도 도출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자녀살인)이 수반되고 있다. 물론 극적으로 아들은 생존에 성공한다. 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어려운 희생을 감수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행위방식을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도출되지 않는다. 고층 빌딩을 파괴하기 위해 여객기를 폭탄 대용으로 사용한 테러리스트들도 신의 임무를 근거로 내세웠고,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거대한 희생(그들의 목숨)도 감수했다.


아브라함의 광신주의는 위에서 언급한 테러리스트들과 자신의(거의 저지른) 범죄의 규모에서만 구별된다. 그들의 공통점은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도덕적 당위를 저버릴 것이 요구한 것이다.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의해 내걸린 슬로건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슬로건과는 반대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라는 문구는 다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언제나 더 비도덕적이라는 것에 대한 경험적인 근거는 없다. 종교적으로 강하게 각인된 시대나 지역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던 시대나 지역의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것에 대한 간접 증거조차도 없다. 따라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무도덕성에 대한 보증도 아니고, 신을 믿는다는 것이 도덕성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까지

  의사결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사사로운 살인이 최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시기까지 여전히 식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는 최근까지 식인을 했던 부족을 촬영했던 다큐도 있으며, 그것을 보고 식인도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식인을 문화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애초에 인간의 본능적인 살인은 창세기에서 나타나듯이 가인의 사례를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도 그렇지만 특정 부족에게 남아 있는 식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선택되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가인도 종교적인 의식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에 대한 분노와 시기심이 살인을 충동질 했다. 식인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행사는 꼭 들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지 않은 행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종교적인 것으로 그것을 포장한다면 죄의식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가인이 살해를 하고 하나님이 부르자 그는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인가라는 질문으로 오히려 되묻는다. 뻔뻔함의 내면에는 종교적인 의식이 이미 끝났음에 대한 기대치가 들어가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매커니즘은 식인을 하는 부족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그런데 식인을 하는 부족과 현대사회에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에 이르는 것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는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나오는 필수가 되어 있는 것이며, 반대의 경우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요인과 명예에 관련된 요인이 주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넓게 본다면 식인을 하는 경우는 더 이상 노동력을 공동체에 제공할 수 없어서 잉여생산물을 낭비만 하는 존재에 한해서 실행된다.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에 관해서 오랜 시간을 걸쳐서 축적된 것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오랜 시간을 두고 이어져 오는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에 관한 전수할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상황이다. 정말이지 더 이상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인간 본래의 가치라는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그러한 원시적인 공동체에서는 인간에게 "효"라는 지적인 산물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효"라는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지적 산물은 고도의 학술적인 용어임을 인지한다면 문명이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현대문명의 살인들은 철저하게 경제와 명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낙태와 영아 살애의 경우는 부담스러운 경제력을 안으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피와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게으름의 도피행위이다. 게다가 거기에 대상이 유전적인 결함이나 신체적인 결함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심화된다. 안락사와 명예로운 죽음의 경우는 자신의 자존감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조금더 명예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죽는 순간의 고통도 있기 마련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것 중에서 고통은 버리고 즐거움만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기심과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실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주는 파장은 무엇일까? 단기적으로 본다면 더 이상 사회에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없는 인간이 커다란 비용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자존심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의 죽음의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원시공동체도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은 생존에 대한 강력한 욕구이다. 살아야 한다는 욕구는 그 어떠한 것보다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남성의 경우는 성욕이 제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각종 성폭력 등이 전쟁이 끝나고 발발한다. 때문에 전투에서 여성과 남성은 결코 같은 부대에 놓고 같은 전투를 못 치르게 되어 있다. 전투력의 급감을 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본능을 경제적, 명예를 위해서 억제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놓은 문명에 역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린 세계는 잔인함 그 자체이다. 그것이 파시즘의 시작이고, 필요없는 존재들,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에서 사용했던 논리와 동일하다. 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과학적인 논리를 거쳐서 정당성을 얻는 순간에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명예로운 죽음 등은 명백한 자살 혹은 타살이다. 그러한 것들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면 다음 타켓은 불특정 다수에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상과 현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다보면 존재하는 것을 등안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하나님은 존재한다. 예수님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믿음에서 존재한다. 개인의 믿음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에게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도 없다. 만일 인간의 과학적 증명으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증명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저 글귀가 아주 깊게 다가온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신을 믿는다면서 혹시 옆에 있는 누군가를 등안시하지는 않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우리도 미신을 믿는자인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간증이나 교회의 부흥에 대한 설명들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부모의 많은 기도가 그중에 하나이다. 부모가 기도했더니 자녀가 잘 되었더라. 부모가 기도를 많이 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었더라. 이러한 스토리를 우리는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들었다. 가난한 학생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교를 갔더라 뭐 그런식의 이야기다. 다시 초점을 교회로 옮겨보자. 기도를 했던 사람이 있고, 교회 부흥과 아주 밀접한 부모가 있다. 그리고 헌신적인 기도로 인해서 최고의 학교에 간 학생과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자녀의 좋은 학교나 교회의 부흥과 동일시되는 기도는 명백히 기복신앙이고 미신이다. 이 미신에서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자녀의 신앙관은 무시되고 당연히 부모의 신앙과 자녀의 신앙이 동일하다는 전제가 있다. 즉, 신앙은 대물림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자녀의 사회적 성공이 신화화 되어서 부모의 헌신적인 기도로 해결된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성도들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곳에 입문한다. 나의 기도가 내 자식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신앙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교회에 있는 우상이고 미신이 되는 것이다. 일전에 찰스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신학교를 나온 분과 이야기를 했다. 그분에 의하면 스펄전의 설교 전에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역시나 기도의 양과 목회의 성공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분석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미신은 성도가 무지하게 많아야한다는 맹신과 과시욕이다. 기대값은 성공이고 수단은 기도이다. 자유함이라는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더욱 풀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가 자녀에게 과도하게 얶매여 있다면 교회는 그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움을 줘야한다. 그래야 참 평안을 맛보는 것이다. 설교 역시 그러하다. 끊임없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토리의 성공적 결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환상은 언젠가 깨지고 되어 있고 자녀의 성공(?)이 되지 않을시에 환상은 확실하게 진 면모를 보여줄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의 아주 유명한 성경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돈과 명예에 해당하는가? 그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 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사도들에게 내가 평안을 주리라라고 했다. 예수님은 평안을 주신다. 우리가 막연히 살아가는 삶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찾고자 하고 이 땅의 참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고자하며, 그 문을 두드린다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보다 위에 있는 존재인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서 많은 우상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대라는 우상이 우리에게 내재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상처받는 수 없이 많은 다수의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밖는 것이다. 비수를 받은 그들은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부모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는다는 책임의 전가, 혹은 나를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다는 실망감 등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은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까지 심어준다. 노동으로 일한자는 비천하고 사무직은 좋다는 인식이 그러하다. 100년전에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가장 먼저 한국인에 대해서 분석한 내용중에 하나가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 의식이다. 때문에 그들은 노동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같은 것이고 일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대부들을 비판하면서 많은 다수의 평민들에게 삶의 의욕과 희망 그리고 성취감을 기대하게 해주었다.


  100년전에 그들이 했던 그 수고로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전히 노동은 비천한 것으로 취급된다. 군대를 갔다온 사람이면 다 공감할 것이다. 일은 하찮은 낮은 계급이 하는 것이고 높은 계급은 놀아도 된다는 아주 쓰레기 같은 관념이 그것이다. 그러한 것을 우리 교회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많은 반발이 올것이라는 것을 너무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잔인하게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서울대라는 환상을 교회에서 하나님보다 더 높은 곳에 심어놓고 다수의 삶에 대한 횡포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잔인함이라는 용어는 꼭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살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무섭고도 잔인한 것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해서 조정하고 권익을 챙겨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간증은 사회적 성공이 주류이다. 나는 믿는다. 최고의 간증은 내가 하나님을 이땅의 참 주인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서울대라는 우상과 수능을 위한 끝나지 않는 태아 때부터의 기도에서 수능 당일날의 시험에 따른 기도가 이 땅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여전히 교회는 미신을 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미신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도한다. 가장 잔혹함의 거짓된 진실을 우리는 신앙간증이라면서 초청강사로 다니고 있지 않는가. 더럽다. 우리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그것에 대한 해방을 해줘야 할 것이지만 오히려 국가의 사회체제와 결속하여 국가의 개가 되어 있는 설교란 더러움 그 자체이다.


한 예로 광우병 사건으로 발생한 촞불집회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한국은 국가에서 가정에 해줘야할 책임에 대해서 전혀 모른척하는 사회이다. 그것은 사교육, 사보험에서 알 수 있다. 바로 광우병은 가정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가장에게 엄청난 부감과 공포로 작용한 것이다. 누군가 불특정 다수중 혹시라도 내 가정이 된다면 국가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생존이 걸린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두려움이 그렇게 집요하게 국가에 소고기 수입을 반대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발현도 아니고 시민의식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처참한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이 다니는 교회나 대한민국의 교회는 그 순간에 국가의 개가 되지 않았던가. 사탄의 무리라는 발언은 끊이지 않았고 불순분자라는 말까지 그야말고 아부와 아첨하는 개독교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더럽다. 미신은 교회안에 있었다.


그런 더러운 미신에 억눌리는 수 없이 많은 교회안의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그들이 진정 그 미신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미안하다. 고작 이런 곳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서 미안하다. 언젠가 힘을 길러서 더 낳은 곳에 더 좋은 글로써 대변하고 싶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좋은 힘을 주실 것이라 기도한다. 괜히 눈물이 흐른다.

교회에서 성도를 묶는 잔인함 - 가족의 이름으로



때로는 내가 지친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가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분위기가 내려가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완전하게 고요함과 끊임없이 쏟아내는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의 거친 목소리만 허공을 찌른다. 바로 그때다. 그 고요함이 흐르고 있을 때. 흔히 말하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목사도 그렇고 성도도 그렇다. 대략 1시간을 때워야 하기 때문에 목사도 내가 볼때는 거의 할말이 없지만 자기도 무슨 말하는지 모를 말을 해야만 한다. 아무도 반응이 없기 때문에 목사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핵폭탄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를 맛 본다. 아마 교회 안에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설교의 내용은 가족으로 넘어간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에 상당히 낮익은 반응을 한다. 그것에서 만큼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부모의 삶은 자녀의 삶과 동일시되어 있는 세상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교회의 잔인함이다. 그들을 구렁으로 넣고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마약과도 같은 설교인 것이다. 처음 온 사람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설교를 꽁꽁 매듭을 조이기 시작하면 나갈 수 없다. 신앙의 자유로움은 어디론가 증발되어 있다. 남은 것은 나의 헌신적인 자녀를 위한 기도소리만 허공을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많은 간증내용도 그런식이다. 가난한 사람이 기도해서 자녀가 잘 되었더라라는 가장 유치 찬란한 그런 것 말이다. 모두가 다 서울대학교를 가야만 하는 잔인한 세상. 금메달주의라고 해두자. 우리는 그렇게 신화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해간다. 꼭 헌신적인 가정의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만 한다. 어떻게 이러한 공식이 가능할까?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눈물샘과 가치는 철저하게 가족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끝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회의 그 어떠한 체제도 가족을 안전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다. 국가가 가정을 버린 것이고 가정은 살기 위해서 사교육 사보험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하나의 줄이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주의는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와 같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한다. 가족과 같은 교회라는 슬로건이 그것이다. 교회는 어디까지 사회집단이고 합리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그에 비해 비합리적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식사를 줄테니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비합리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꽁자 점심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가정을 나가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거래가 있기도 하고 보이는 거래도 있다. 교회라고 물질 만능주의는 없겠는가? 인간이 활동하는 예배당의 공간에서 그 어떤 누구도 편안하게 자리를 줄이는 경우는 드물다. 무조건 거의 절대적으로 많이 만들어야한다. 사람이 많으면 이유 불명 무조건 좋은 것이다. 100명이 출석인 교회에 500개라는 의자가 있어야 하고 사람은 닭장신세가 되어도 필요없다. 누구의 욕망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기가 막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했다. 우리에게 평안의 예배를 드릴 권리가 있다면 무엇보다 예배당은 깔끔하고 청결하고 또한 인간이 이동하고 행동하는 것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자리배석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을 주님이 주신 것이라 말해선 안된다. 그리고 그곳에 가족이라는 그 잔인함의 단어는 절제되어야 한다. 가족은 중요한 집단이지만 그것으로 인간을 묶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적어도 예배의 그 시간동안에 대한민국의 수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서 자유로움을 얻기를 기도한다. 그들이 그 엄청난 짐을 잠시 내려놓기를 기도한다. 나는 가끔 기도한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움을 얻기를 원하며 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일전에 김대중 대통령 기획경제팀에 들어가지 못했던 어떤 사람이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각종 구호기금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무엇이라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잔인함의 구호기금, 가족애를 자극하고 눈물샘이 터지면 국가는 않아서 돈을 긁어가는 것이다. 태풍이 와도 구호기금, 재난이 터저도 구호기금을 위한 눈물샘만 자극하면 끝난다. 여전히 사회적인 안전망은 없다. 왜 국가참사에 국민의 호주머니가 매년 들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다.


공적기금에 대한 마약중독은 어디에서도 동일하다. 교회도 그러하다. 건축을 위해서 끊임없는 자극들 주님의 뜻 그리고 어마어마한 빛더미가 남는다.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60억이라는 상상도 못할 금액은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헌금은 빛더미의 해결에 쓰이고 그리고도 부족한 금액은 눈물샘과 가족애를 넣어서 포장하고 슬그머니 호주머니를 건든다. 심지어 총신대는 거대화된 교회를 대상으로 매달 10000원 정도에 해당하는 기금헌금을 요구한다. 마치 작은 액수인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호주머니를 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계좌를 만들어서 매달 빠져나가게 하는 잔인한 인간들이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크게는 가족의 확대판으로 이어진다. 가족같은 교회를 강조하고 담임목사가 총신대 출신이고 그렇다면 총신대는 자기내들의 가족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공적자금은 유유히 분출되는 샘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원의 샘이다.


교회가 사회의 어둡고 아쉬운 곳을 건들어야 한다면 구제와 동시에 국가에 건의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물론 교회가 사회단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곳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것인가에 관한 질문의 답을 우리는 혹시 거대화와 가족애가 있는 비합리성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런 것에서 자유하자. 나의 바램이다. 다시는 이 땅에 수능이나 기타 자녀의 삶을 위해서만 살지 말자.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고 영원히 같은 길을 갈수도 없는 나락이다. 아! 이땅의 교회에 수능특별기도회가 사라지는 것이 내 바램이다. 새학기가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이토록 잔인한 마약을 또 다시 시작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수능 300일 200일 100일 50일 10일 기도회 그리고 수능 당일날은 시험시간에 따른 과목별 기도까지 끝도 밑도 없이 자녀를 구설수로 삼아서 마약을 주입하는 것이다.
심지어 태아 기도회까지 교회에 들어가는 그 순간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것이 있는가. 그 모든 것에 내 자녀가 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다는 환상이 깊에 박혀 있는 것이다. 자녀가 내 것이 되어 있는 신앙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려놓지 못하는 잔혹함. 탈무드의 한 사례가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표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랍비가 어느날 아내에게 "누군가가 보물을 맡겨 놓고 찾으러 왔을 때에 줘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곧 랍비는 당연히 줘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아내가 주인이 와서 보물을 가져갔다고 말한다. 이에 랍비는 의미를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례이다. 나에게 소유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면서 이땅의 부모라는 입장에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겪어야하는 고민거리이다. 그들이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신앙적인 훈련과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한 고민이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두가 다 탈무드의 예처럼 차분할 수 없으나 영화나 TV를 통해서 보는 장례식의 풍경을 한국과 외국을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은 울어야 한다. 무조건 눈물의 바다가 되어야 하고 또 곡을 해야한다. 하지 않는다면 무정한 놈이 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그러나 외국의 사례를 본다면 눈물을 흘릴지언정 한국과는 사뭇 정숙함을 유지한다. 그들의 사뭇 정숙함의 장례식은 기본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신앙의 표현으로 판단된다. 김수환 추기경이 죽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신자들을 보라. 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잔인함이고 가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확대판이다.

태극기를 등에 달고 질주하는 폭주족의 내면세계에 관하여

태극기를 등에 달고 질주하는 폭주족의 내면세계에 관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영원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한국인이라는 것부터 정의해보자. 한국인, 필자가 지금까지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주제이다. 무엇이든지 한다는 기가막히는 이야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무엇이든 한다라는 것에 개인이 희생을 당하는 것은 두번째의 일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횡포를 하는 것이 당연한 국가는 여전히 야만적인 사회집단일 뿐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소속된 학교를 절대화하는 것은 국가를 절대화하는 교육의 일환이며, 학생과 스승은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비합리적인 것들이 실제적인 사회체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학생과 교사는 서로 무관계의 이익집단이다. 학생은 교사에게 필요한 것만 배우면 그만이고, 교사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법과 행정처리로만 여기면 된다. 여기서 사적 감정은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냉정하게 학생을 대해야 한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도 아니다. 이 행정적인 관계의 기본조건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이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곳 짐승의 세계와 사뭇 닮은 한국에서는 개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다른 개인과 연관을 시키는 연습을 한다. 몇회 졸업생은 영원하다라는 구호 등이 그것이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시민사회는 잔인한 정글이다. 이곳에는 맹수를 견제할 수 있는 아무런 사회적 제도가 부재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길거리로 내몰리는 학생들, 성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존재를 못찾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배웠던 태극기와 오토바이의 질주 뿐이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3.1절이라는 어떻게 되어진 사건인지도 모른채 달린다. 그들의 등에 태극기가 있다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정치가의 입가에는 웃음이 슬며시 나올 것이다. 무엇인가 허전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잔인한 구석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발톱빠진 젊은이들은 국가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태극기가 필수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학생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다. 국가는 결코 비판하는 자세를 가진 학생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의 뒷마당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오토바이의 기름이 바닥나는 그곳에 대한민국이라는 실체를 찾을 수 있는가? 한국인, 대한민국, 효 등은 모두가 다 환상성을 우리의 가슴에 심기위한 장치일 뿐이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결박할 수 없는 나, 나는 내가 되기 위한 육체이다라는 사실, 그 무엇으로도 나를 의미부여 할 수 없으며, 오직 내가 나에게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정말로 나는 나를 의미부여 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다면 당신은 신을 찾을 수 있다. 그때에 당신에게 주님이 다가 올 것이다. 주님은 말씀했다. 찾으라, 구하라, 두드려라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맹목적으로 질주하지 말고 냉정하게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주가 잔인한 존재도 아니다. 그가 잔인했다면 애초에 이 땅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이 땅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말이 그렇지. 오토바이타고 태극기를 등게 달고 달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참 암담하다. 뭐가 그렇게 가슴에 응어리가 쌓여있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애국을 해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뭔지.

욕망은 아름답다

    넓게 본다면 신학에서 말하는 천국도 욕망에 해당하는 것일까. 더 낳은 곳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의 마지막 궁극점이 천국이라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은 아름답다. 인간이면 누구나 욕망에 휘감싼다. 소유, 명예, 지식 그리고 심지어 죽음도 갈망하기도 한다.


    절제와 절약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주 어린 시절에 강제적으로 배워왔던 우리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의 아름다움을 사용하기에는 어디에선가 어색한 감정을 가진다. 초등학교 중학교 등등에서 제출하는 집안의 가훈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그 어떤 집안도 욕망이라는 코드와 비슷한 것을 필자는 한번도 본적이 없다. 모두가 근면, 절제, 절약 등의 무엇인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을 제어하는 뉘양스를 가지는 것 뿐이다. 그 자체로만 본다면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설량하고 천사컴플렉스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녀들은 어느새 20세가 넘어가고 그들 내면에 너무나도 깊게 자리잡은 욕망의 제어코드가 역효과를 내기 시작한다. 과시, 물질만능주의, 성의 노예화, 여성만 선택해서 죽이는 살인자들과 원조교제 등이 욕망이라는 제어되고 감추어야 했던 것들의 과격한 표현이다.


  우리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학교에서 저금이라는 10000원부터 50000원까지 한달에 한번씩 저금을 한다. 그 돈은 결국 부모의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고, 학교와 은행은 서로 이익을 추구하고 아주 약간의 이자만 학생에게 지급한다. 저금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 어떤 프로그램도 학생에게 효과적인 돈의 사용과 욕망의 아름다운 사용법을 말하지 않았다. 한번도 집안에서 안놓치고 저금을 하는 학생은 우수한 학생이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불량이 된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돈을 사용하는 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욕망의 표현 수단이다. 그 돈을 잘 사용할 수 있다면 성인이 되어서 내면의 욕망을 잘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는 나 혼자 있는 곳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적인 약속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내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는 욕망을 제어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존중하고 그가 부가 많은 적든 사용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욕망을 표현했을 때에 제어받지 않기 위한 장치이다.


  필자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관해서 관심이 많다.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인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고 그것이 아주 극단적인 마약과 살인 등의 금기시 되는 것에 한해서는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인정한다. 나는 집안의 가훈을 제시하는 많은 학생들에게서 즐겁게 살자, 표현하며 살자 등의 내용이 많기를 바란다. 또한 이 땅의 많은 학생들이 교복이라는 것으로 표현의 욕구가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은 부한자와 그렇지 않는자가 있다는 사실을 어린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하는 눈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벤허의 명대사

집정관 : 배가 침몰한다 해도
사슬 때문에 탈출은 못해

벤허 : 사슬에 묶여 죽으라고
하나님은 저를 3년이나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벤허의 진짜 명대사는 이 부분이라 생각한다. 벤허의저 엄청난 믿음과 신뢰. 나도 가끔 생각한다. 지금의 이 힘든 시기에 그냥 이데로 죽으라고 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믿는다.

예수가 인터넷을 사용했는가

산상수훈을 설파하기 위해
예수가 인터넷을 사용했는가.
자신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예수가 스팸 메일을 사용했는가.

사도 바울은 성능 좋은 메모리와 업 버전을 사용했는가.
그의 편지들은 바울@로마.컴이라는 이메일 명으로
성경 게시판에 올려졌는가.
마케도니아에서 떠날 때 그는 문자 메시지로
'가도 되는가'를 묻고 출발했는가.

모세는 바다를 가르기 위해
전자 게임기의 조종간을 작동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기 위해
위성 추적 장치의 도움을 받았는가.
그는 십계명을 손으로 썼는가.
아니면 영구히 보관되도록 CD에 기록했는가.

예수는 어느 날 나무 위에서
정말로 우리를 위해 죽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올로그램인가.
또는 컴퓨터 합성인가.
그것은 무선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면,
다른 목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
하나님의 목소리가 당신 귀에 가닿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노트북과 컴퓨터와 인터넷과
다른 모든 멋진 도구들을 내려놓으라.
그리고 순수함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 곁에 있으리라.

-작자 미상, 로마 가톨릭 교황청 홈페이지에 오른 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서 이것에 관한 답변은 정말 놀랍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그 존재가 변치 않으시는,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정의와 선하심과 진리이시다.

신학의 정의

신학의 실제적인 정의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다.

- 케이 워렌
 
 
  신을 연구하는 학문인 신학. 내 생각에는 신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었다고 봐야겠다. 대체 이 성경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가 그들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데에 기여했다.
 
  때문에 신학과 믿음은 단절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학을 연구하는 입장은 신을 믿느냐 안믿느냐는 별개의 것으로 오히려 신을 좀 더 객관화해서 연구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이다 - 르네 지라르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칠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르네 지라르의 통찰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프로이트에서 시작한 인간 욕망의 근원을 찾고자하는 수 없이 많은 이론들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이어 라깡의 욕망이론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르네 지르라의 이론은 욕망의 근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나의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타인을 찾아야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존재는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인간들이 서로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방하는 사회인 것이다. 조금 더 좋은 핸드폰, 아파트, 의복, 자동차 등이 그 모든 욕망의 산물인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이 가진 그것을 소유한다면 나도 저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가 신이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줄임말인 '엄친아'라는 것이 욕망의 표상을 보여준다. 바로 저기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닌 바로 내 곁에 있는 그가 나의 신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타인을 따르는 욕망이란 예외없이 타인이 되고 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예수의 경우에도 비슷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인간에게 단 한번도 보여진적이 없는 신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 수 없이 신들과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인간들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끊임없는 신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행한 선한 행동들은 타인들에게 신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어찌되었든 그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철저하게 자신을 들어내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신의 영역에 남게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입장은 어떠했을것인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그의 행동이 인간에게 신적으로 보였다면, 예수는 인간을 바라보면서 신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그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배고픔도 느끼고 추위도 느끼고 아픔도 느꼈을 것이다. 배부르게 먹는 사람을 보면서 정말로 단 한번도 그러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배설의 욕체적인 쾌락을 단 한번도 느끼지 않았을까? 배설은 오직 대변과 소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욕 역시 배설의 욕구와 거의 유사하다. 혹시 그는 성욕을 마음껏 해결하는 타인들이 부럽지는 않았을까?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적용한다면 예수도 인간을 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예수에게 신처럼 비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 몇몇 그가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예수가 부족한 것이 물질적인 가치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가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에서 가지고 싶은 욕망의 개체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에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의 인간적인 감정이다. 분명 성경은 예수의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분노를 할때도 있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문에 그의 인간적 감정은 자연스럽게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의 부족한 부분을 예수가 본 사람들에는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가 본 인간의 숫자란 그 당시의 전체 인류의 숫자와 비교하면 너무 작다. 그 당시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예수가 모방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고해서 인류 전체에 대한 부러움과 모방이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예수가 말한다. 들에 있는 풀도 하나님이 기르는데 하물며 너희 인간들이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렇다. 풀이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나님이 기르는 풀을 보고 인간은 자연스럽게 부럽게 느껴지게 된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욕망의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이 될 수 있고 모두 신의 아류가 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대중문화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나의 거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예전에 봤던 마티즈차에 붙어 있던 글귀는 가끔 웃음을 자아낸다.

"나도 어서 커서 에쿠스가 될래요!"

당신이 바라보는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하고 어떻게하면 타인에게 자신이 신처럼 보이게 할 것인지는 신이 되느냐 신을 바라보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할 것이다. 이제 결정할 수 있다. 타인에게 나를 신처럼 보이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타인을 신처럼 바라보고 살아갈 것인가...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라는 세간의 말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2012년 2월 9일 목요일

창조론 vs 진화론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비이성적임을 인정하는 것일까? 문득 등산을 하고 오는 차안에서 그러한 생각을 했다. 신비, 경외, 두려움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종교적인 의식에서는 이성적인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종교적 의식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을 자극하는 인류의 고유한 문화형태일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종교적 형태의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신앙에게는 불쾌하다. 그래서 그들도 그들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표현한다. 창조과학 또는 지적 설계자라는 표현으로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유명한 창조론이다. 다윈이 거대한 종교의 담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데 그것이 곧 진화론이다.

   이 두가지의 이론은 참으로 흥미롭다. 서로 내가 옳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비인격적인 대접을 하기 쉽다.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도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적인 고백과도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 신앙을 가진사람이 진화론을 인정한다면 그의 신앙의 결정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무신론자이고, 신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그 자신에게 불쾌하게 된다.

우선 진화론은 인간의 문명에 대해서 설명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과 인간의 문명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말인가하니 인간 스스로의 진화에 의해서 이 땅의 문명이 현재에까지 왔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답을 내릴 수 없다. 즉, 문명은 분명 인간이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이루어놓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이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거나 진화되었기 때문에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원숭이에서 인간이 진화를 했다거나 다른 생명체로부터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면, 왜 인간은 문명이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만들어야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논하지 못한다. 문명이 반드시 생존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가장 큰 핵심은 필자는 생존이라고 본다. 생존에 더 유리하기 위해서 신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문명은 인간에게 해악일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진화론은 엉뚱한 곳에 쓰인다. 일본이나 히틀러가 사용했던 것이다. 더 우월한 인종이기 때문에 다른 인종은 죽어야한다는 논리에 사용되었다. 유태인의 대학살과 조선인의 무차별적인 죽음 등이 그것이다. 만일 인종과 민족의 고유성이나 우월성이 존재한다면 분명 진화론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인종과 민족에 차이는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족성이라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후천적인 결과물이지, 그것 자체가 사회문화의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아주 쉽게 이해를 해본다면 문화는 선천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 예를 들자면 조선과 일본이 아주 대표적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했고, 조선은 계속해서 외국의 문물을 개방하지 않았다. 이 둘의 차이는 인종의 차이라고 설명해버리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거나 어디에서 문제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된다. 즉, 어떠한 사회적 구조와 차이점을 이 두 국가의 운명을 변화시켰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오직 인간의 차이점이라면 열등한 존재가 살아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진다. 살인도 정당해지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된다. 우리는 어떠한 구조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되었고, 또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지금까지 인간이 과학과 기술의 발견으로 이루어왔다. 문명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일본과 조선의 차이점을 인종에 두어서는 안된다. 사회의 구조와 원인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는 실현시킬 수 없었는가에 대한 고민과 반성으로 이어질때에 더욱 발전된 문명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전무결한 이론일까. 앞에서 이미 진화론이 문제가 많은 이론임을 밝혔다. 창조론 역시 완전 무결할 수 없다. 창조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종교인가 아니면 이론인가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창조론을 굳게 믿는 이유는 이성적인 과학적 추론에 의한 믿음인지 종교나 신앙에 대한 고백의 일환으로서 사용된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누구 쉽게 말하지 못한다. 만일 이성과 논리를 전제로 창조론이 맞다고 한다면 그가 꼭 신앙인이거나 종교인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창조론을 지지하는 부류는 신을 믿는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신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지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화론자들의 입장과 논리를 듣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단어와 함께 부정해버린다. 이들은 신앙의 대변을 마치 창조론이 하고 있는 듯한 뉘양스를 풍긴다. 자신이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해버린 결과인 것이다. 왜 그럴까? 이곳에 필자의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렸다. 이들이 창조론을 지지함으로서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즉 도구화된 창조론을 말함으로써 신앙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무엇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해 본 것이다.

   이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서 얻은 결론은 내가 신앙인임이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의 신앙이 고작 이론에 의해서 드러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사실인가. 무릇 그리스도를 닮는자는 인격적인 성숙도 반드시 필요한데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외가 되고 있었다. 창조를 강조할 수록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는 더욱 불필요해진다. 신앙의 증명이 이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 창조론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주 간편하기 때문이다. 내 신앙이 고작 이론 따위로 증명되고 타인에게 암묵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은 솔직히 창피했다.

   신앙인에게 너무 편리한 도구인 것이다. 어떠한 과학적, 논리적, 이성적인 추론과 분석이 필요없어진다. 창조론은 그렇게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편리하다. 신앙의 증명이 이렇게 편리하다면 창조론을 지지못할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박예의 정신을 시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행동을 요구하는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논란이 많다. 꼭 행동을 해야만 하느냐,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말하거나 또 혹자는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신앙인들의 사이에서 논란이 된다. 즉,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히는 것이다.

   행동을 요구하는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논란이 나타나지만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 창조론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신앙인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화론은 영원히 금기와 같은 단어가 된다. 만일 어떠한 목사가 진화론이 옳다라고 말한다면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창조론의 바로 그 편리함이 숨어있는 듯 하다. 행동이 필요하지 않는 이론이지만 나의 신앙이 증명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합리적이고 신적인 것인가!!할렐루야!!

   결론을 내린다면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는 듯한 뉘양스에 자신에게 약간은 부담이 된다. 또한 주변의 같은 신앙인들의 사이에서도 쉽지 않아보인다. 반대로 창조론은 그 어떠한 신앙적인 행동과 도덕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냥 지지만하면 내 신앙은 증명되어진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신앙적인 행동 및 도덕적 행동도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창조론은 지지한다!! 나는 고로 신앙인이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그 밑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등산을 마치고 잠시 쉬면서 생각해보았다.

대한민국 기독교의 힘의 근원

   지금 정부뿐만 아니라 이승만정권부터 기독교의 힘은 실로 강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와 재벌과 종교가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를 비난한다.

   지금의 정부는 기독교와 아주 밀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의 관계라면 공생관계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많은 종교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스스로 깨끗해지고 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에 지나칠 정도의 도덕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면 영원히 해결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잣대란 기준과 판단을 쉽게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그렇게까지 도덕적이지도 않다. 성직자의 경우도 우리가 그들을 초인으로 바라봐선 안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한국 교회와 외국의 교회의 아주 기본적인 다른점은 교회 출석에 목숨을 걸고 있으냐이다. 한국 교회는 마치 학교처럼 교인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감시하려고 한다. 교인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처벌은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권력자들과 재벌들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러면 이들이 손을 잡았다고 힘이 나타날까. 기독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힘은 강하다. 실로 타 종교가 결코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매주마다 10만명이 모이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엄청난 힘을 지닌 집단이다. 그리고 이 집단은 민주주의가 꽃피면서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것의 비밀은 투표권에 있다. 이들의 투표율은 다른 종교집단보다 더욱 악랄하고 집요하다.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라고 배운다. 바로 그 투표를 철저하게 이용하기 때문에 정치 집단과 재벌이 이들의 투표권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견고한 우파의 힘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단이 강력하게 밀어부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들을 끝까지 신의 이름으로 밀어줄 집단이 존재하는 한 투표를 통해서 계속해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요즘 현대자동차의 부품을 조달하는 중소기업에서 노동자가 파업을 했다. 모든 신문이 이들을 연봉 7000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면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힘은 약하다. 이들의 힘이 약한 이유는 이들의 권익과 보호를 해줘야할 민노당이나 민주당의 힘이 한참이나 약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투표율은 형편없다. 우리는 서울시장 투표에서 강남지역의 살벌한 투표율을 봤을 것이다. 그들을 결집시키는 장소가 교회이고, 이곳에서 힘이 모이는 것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주 모이고 이야기하고 토론을 해야하는데 노동자들은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어디 어디 투표하자고 궐기대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교모임은 이 모든 의혹에서 자유로워진다. 신의 이름으로.

   그렇기 때문에 결집력이 약한 타 종교나 계층에 비해서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집단이 분명히 이 땅의 노동자와 중산층을 위해서 많은 법적인 조취를 취했으나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 혜택에 관해서 설명해주는 강력한 신의 가면을 쓴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정이 다르다. 교회의 힘이 모여서 어느 정치인을 당선시키면 당장 교회의 외관과 지원이 달라진다. 소망교회와 순복음교회가 수없이 많은 신문과 언론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표를 받아 먹는 정치인이 결코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언론매체에서 끊임없이 대통령 앞에 장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기독교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반면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력이 약하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가 행한 정책들이 사실상 불특정 다수에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투표율도 매우 저조한 부류였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말한다. 잃어버린 600만표를 가져오겠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매우 약한 지지층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꾸 혜택과 뭔가를 던지려고 한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가르켜 포플리즘이라고 말한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표를 충성스럽게 던지는 집단인 영남권과 서울의 기독교층에게만 편의를 봐주면 되지만 민주당은 모든 면에서 약자의 입장에 속한다.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노동자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대한민국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와 경쟁을 하면서 삶의 질은 더욱 비참해지고 있는 입장이다. 필자는 이 부분이 정말 가슴아프다.

   이쯤되면 대한민국 기독교의 힘은 단순하게 정치권력과 재벌이 손을 잡았다고하는 비판이 아닌 투표로 재해석해봐야 할 것이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민주주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과연 잘못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억울하면 투표해야 한다.

박주영 국가대표

  이번에 박주영이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그가 정말로 아주 잘하는 선수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솔직히 그의 기록은 그가 아주 출중한 선수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의 전 소속팀은 강등되었고 그에 대한 책임은 공격수인 박주영에게도 분명히 있다. 게다가 그가 케이리그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그가 월드컵에서도 아주 대단한 활약을 했다기 보다는 박지성이 정말 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혹은 이영표 정도.


  아무튼 그의 능력을 대변해줄만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인듯하다. 물론 각종 개인의 블로그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그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언론의 기사화되고 있는 점은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선수들과 분명한 차별이며 그런 사회적인 비용에 비해서 국가대표나 국가가 얻을 이익이 적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특정 선수가 언론의 비호를 받으면서 국가대표에 무사태평으로 안착해버리면 그 동안 진실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k리그에서 자국리그의 활성화에 힘쓴 대부분의 선수들은 뭐가 되는 것인지...


  박주영의 국가대표 발탁은 단순히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리그의 선수들의 사기와 의지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마져 깨버린다는 점이 정말로 큰 문제이다.  박주영은 아스날이라는 정말 세계에서 인정한 위대한 클럽이다. 아스날 감독은 전무후무한 프리미어리그 무패우승의 주역이고 엄청난 재정난에 선수하나 재대로 영입못하면서 잇몸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상위권을 항상 노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박주영을 안쓰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k리그보다는 기량이나 실력이 좋지 않겠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반박은 또 더욱 웃기는 상황이 연출된다. 국가대표의 자리가 주전으로 혹은 교체로도 출장하지 못하는 선수의 희생무대가 되어야 하느냐이다. 그의 개인 컨디션의 도움을 주기 위한 자리이냐이다. 그러한 방향으로 설정해서 그가 국가대표자리에서 아주 잘해서 개인컨디션을 끌어올려서 다시 벤치에 있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은 공평의 문제도 반드시 제기되어야 한다. k리그의 활성화와 그곳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앞으로 자신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k리그는 계속해서 선수들과 일반 관중에게 버림받는 그냥 이름도 없는 리그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지성의 은퇴는 더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힘든 선택이었다고 본다. 박주영의 이번 발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문에 희생당하는 k리그 선수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2012년 2월 8일 수요일

가정부 미타 - 한국과 일본 가족의 비극

  가족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모호합니다. 시대마다 가족의 개념은 다르고 지역, 나라, 인종 등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인간의 삶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념의 차이때문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 차이가 가족문제의 차이를 만들뿐이지 없지는 않기 때문이죠. 가족의 진정한 문제점의 원인은 그 형성과정이 사랑을 가장한 이성적이고 비지니스적인 업무라는 특이성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오히려 양극의 상황은 대략 직면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해결책을 가질 수 있다. 혹은 가지고 있거나. 즉, 완전한 사랑이나 극단적 비지니스 결혼은 오히려 안전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중간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비지니스. 필자는 『가정부 미타』를 보면서 더욱 확신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저출산의 문제는 심각하다. 국가는 아이를 많이 낳으세요라고 홍보하지만 그 아이에 대해서는 책임지기를 싫어합니다. 한국과 일본 정치인과 재벌의 더러움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죠.

   필자는 가장이나 아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우리의 잠재의식에는 가장=남자, 아내=여자라는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여자 남자로 하겠다.

   드라마에서 아이는 사랑의 대가로 치환하기에는 너무 괴로운 부분이 있다. 최소 한국과 일본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부와 그리고 아이는 4명. 아마 국가의 홍보물에 충실해서 그럴 수 있을 것인지 아이가 아주 많다. 어찌되었든 남자는 다른 여자를 찾고 여자는 자살한다.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 4명과 남자. 집안에 아내가 없어지자 집안은 형편없어진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 빈공간을 가정부미타가 채우지만 무엇이지든 해내는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가정부가 있지만 가족의 일원이 되지 않는다.

   이 가족의 진짜 문제는 남자가 자녀들에 대해서 아무런 양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녀가 없거나 한명이라는 상황이라면 남자의 행동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빈공간을 가정부미타가 채우지만 무엇이지든 해내는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가정부가 있지만 가족의 일원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해주는 가정부 미타를 국가라는 것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그러면 안될까?

   군대에 들어가는 쓸데없는 돈들과 토건족을 위한 돈으로 우리에게 저만한 가정부가 있다면 자녀를 4명이상으로 낳아도 되지 않을까? 가정부미타가 정말 40프로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의 우리 가정에 정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지금의 가정에는 누군가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차라리 4명의 자녀와 남자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자살을 하는 편이 더 좋을 정도로 피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요하다. 가정에 누군가가 필요하다. 가젯트의 만능팔처럼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이 결코 아이를 임시로 키워주는 시어머니, 친어머니, 또는 가정의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 그래야하나. 그 자리에는 반드시 국가가 와야한다. 국가가 아이를 낳으라고 그토록 홍보했으니 책임도 져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편의와 행복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들은 진실로 생존의 기로에서 자녀는 독약과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지는 가정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최소한 국가에서 반강제적으로 출산을 부축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자녀를 많이 낳기를 바란다면 "가정부 미타"를 주라. 그것도 꽁자로 그들은 돈이 없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돈이 없다. 어떻게 알바나 하는 청년들이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인가...



 지금의 이 어두운 가정에는 가정부 미타가 필요한데 그것은 알바비로는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신이 되어버린 이명박과 나꼼수

   미셸 푸코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감시와 처벌』에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감시탑이 한 가운데 있고, 그 감시탑을 중심으로 원형 모양으로 수용소가 설치됩니다. 모든 수용소의 각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있기 때문에 중앙의 감시탑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노출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수는 결코 중앙의 감시탑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불이 켜져있지 않는 어둠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죄수는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되면서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의 모든 것이 노출되고 개방되어 버린다는 것은 결코 수용자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범죄자가 감옥에 가면 아주 혹독한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룰이 있는데 그것은 감시원과의 원만한 관계유지입니다. 우리는 범죄자가 사회의 룰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룰을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감시원 즉 교도관과의 원만한 관계를 가져야 감옥 생활이 아주 편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 어떠한 교도관도 24시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도관들도 자신들보다 더 높은 상급기관의 순찰이 아니면 적당한 수준, 즉 자신들이 커버할 수 있는 수준에서 범죄자들과 적당히 지냅니다. 그리고 상급부대의 순찰이 왔을 경우는 범죄자들도 자신들이 충분히 감시받고 교육받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을 스스로하죠. 만일 그렇지 않았을 경우 상급기관의 사람들이 되돌아간 이후는 정말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자발적인 참여라고 봐야겠죠.
    다시 원형의 수용소로 돌아오면 이들은 정말 완벽하게 감시자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은 감옥은 환하게 빛나고 감시자의 탑은 어두운 곳이라서 보이지 않아서 지금 그들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정보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 사실은 자신들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떤 죄수자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게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시자를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오히려 더 심리적인 안정감을 취하게 됩니다. 점점더 수동적으로 되어가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만들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하나의 신이 되음로써 구속과 감시가 아닌 자신의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신의 내면화라고 봐야겠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두발단속을 아주 심하게 하거나 정말 스트레스를 줄 정도로 강도를 높이면 그러한 감시와 처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예 머리를 빡빡깎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심지어 여학교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발생합니다.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감시와 처벌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마지막 열망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대중에게 아주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는 "나는 꼼수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주변의 사람들은 어떠한 현안에 관해서 논리와 필요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강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천안함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관해서 우리는 그 어떠한 논리적인 논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직 믿으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폭탄이 터졌는데 왜 사람들의 고막은 정상인가라는 질문에 관해서 아무런 답변도 없었습니다. 왜 화약냄새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에서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형광등도 깨지지 않는 기괴한 과학이 출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사용을 합니다. 미네르바사건, G20 쥐포스터사건, 광우병사건, bbk, 무상급식 포플리즘화 등으로 국민들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통제하고 컨트롤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자신들을 믿어달라는 이야기뿐이지 결코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FTA의 협상과정을 봐도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에서 먼저 승인을 했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할뿐입니다.
   이렇듯 국민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는 상황은 국민들에게 굉장히 스트레스가 됩니다. 이와함께 몇몇의 국민들은 결국 이명박을 신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램은 누군가가 신호탄을 쏘는 순간 시작되죠. 
   "나는 꼼수다"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너무 지나친 국민들에 대한 통제와 간섭이 이제는 그를 신으로 만들어야만 속이 후련하게 된것이죠. "나는 꼼수다"에서는 처음부터 각하를 위한 헌정방송이라면서 오직 이명박 대통령을 위한 방송이라고 말합니다. 묘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발언에서 위안과 즐거움을 얻게됩니다. 그가 차라리 신이 되어야 편해버린 것입니다. 어차피 대화도 안통하고 협상도 안되고 무조건 믿으라는 식이니 국민들도 그를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이되어버린 이명박은 이제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비범한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사회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집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아무런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는 신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의 진짜 목적은 신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다 그의 의도였다면 성공했다고 봐야겠죠.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꼼수다"는 이명박 대통령을 신으로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나는 꼼수다"를 통제하고 검열한다고하니 아마 곧 신으로 모시는 종교단체 및 모임이 결성될 것이라 기대가 되네요. 이러한 현상은 북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북한사람들이 멍청해서 김정일과 김일성을 신격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통제와 감시에 질린 나머지 차라리 신으로 모시는 것이 당장 사는 것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이명박 대통령 종교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나꼼수가 대중적인 지지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명박을 더욱 신격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각하의 헌정이 아닌 어떠한 존재로 드러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