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9일 목요일

창조론 vs 진화론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비이성적임을 인정하는 것일까? 문득 등산을 하고 오는 차안에서 그러한 생각을 했다. 신비, 경외, 두려움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종교적인 의식에서는 이성적인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종교적 의식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을 자극하는 인류의 고유한 문화형태일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은 종교적 형태의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신앙에게는 불쾌하다. 그래서 그들도 그들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표현한다. 창조과학 또는 지적 설계자라는 표현으로 과학적 증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유명한 창조론이다. 다윈이 거대한 종교의 담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데 그것이 곧 진화론이다.

   이 두가지의 이론은 참으로 흥미롭다. 서로 내가 옳다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비인격적인 대접을 하기 쉽다. 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도 싫어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적인 고백과도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기독교 신앙을 가진사람이 진화론을 인정한다면 그의 신앙의 결정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무신론자이고, 신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그 자신에게 불쾌하게 된다.

우선 진화론은 인간의 문명에 대해서 설명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과 인간의 문명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말인가하니 인간 스스로의 진화에 의해서 이 땅의 문명이 현재에까지 왔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답을 내릴 수 없다. 즉, 문명은 분명 인간이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이루어놓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인간이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거나 진화되었기 때문에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원숭이에서 인간이 진화를 했다거나 다른 생명체로부터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면, 왜 인간은 문명이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만들어야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논하지 못한다. 문명이 반드시 생존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가장 큰 핵심은 필자는 생존이라고 본다. 생존에 더 유리하기 위해서 신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문명은 인간에게 해악일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진화론은 엉뚱한 곳에 쓰인다. 일본이나 히틀러가 사용했던 것이다. 더 우월한 인종이기 때문에 다른 인종은 죽어야한다는 논리에 사용되었다. 유태인의 대학살과 조선인의 무차별적인 죽음 등이 그것이다. 만일 인종과 민족의 고유성이나 우월성이 존재한다면 분명 진화론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인종과 민족에 차이는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족성이라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후천적인 결과물이지, 그것 자체가 사회문화의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아주 쉽게 이해를 해본다면 문화는 선천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 예를 들자면 조선과 일본이 아주 대표적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했고, 조선은 계속해서 외국의 문물을 개방하지 않았다. 이 둘의 차이는 인종의 차이라고 설명해버리면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거나 어디에서 문제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된다. 즉, 어떠한 사회적 구조와 차이점을 이 두 국가의 운명을 변화시켰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오직 인간의 차이점이라면 열등한 존재가 살아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어진다. 살인도 정당해지고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된다. 우리는 어떠한 구조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되었고, 또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지금까지 인간이 과학과 기술의 발견으로 이루어왔다. 문명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일본과 조선의 차이점을 인종에 두어서는 안된다. 사회의 구조와 원인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는 실현시킬 수 없었는가에 대한 고민과 반성으로 이어질때에 더욱 발전된 문명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전무결한 이론일까. 앞에서 이미 진화론이 문제가 많은 이론임을 밝혔다. 창조론 역시 완전 무결할 수 없다. 창조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종교인가 아니면 이론인가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창조론을 굳게 믿는 이유는 이성적인 과학적 추론에 의한 믿음인지 종교나 신앙에 대한 고백의 일환으로서 사용된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누구 쉽게 말하지 못한다. 만일 이성과 논리를 전제로 창조론이 맞다고 한다면 그가 꼭 신앙인이거나 종교인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창조론을 지지하는 부류는 신을 믿는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신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지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화론자들의 입장과 논리를 듣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단어와 함께 부정해버린다. 이들은 신앙의 대변을 마치 창조론이 하고 있는 듯한 뉘양스를 풍긴다. 자신이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해버린 결과인 것이다. 왜 그럴까? 이곳에 필자의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렸다. 이들이 창조론을 지지함으로서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즉 도구화된 창조론을 말함으로써 신앙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무엇을 변호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해 본 것이다.

   이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던짐으로서 얻은 결론은 내가 신앙인임이 드러난다는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의 신앙이 고작 이론에 의해서 드러난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사실인가. 무릇 그리스도를 닮는자는 인격적인 성숙도 반드시 필요한데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외가 되고 있었다. 창조를 강조할 수록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는 더욱 불필요해진다. 신앙의 증명이 이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 창조론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주 간편하기 때문이다. 내 신앙이 고작 이론 따위로 증명되고 타인에게 암묵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은 솔직히 창피했다.

   신앙인에게 너무 편리한 도구인 것이다. 어떠한 과학적, 논리적, 이성적인 추론과 분석이 필요없어진다. 창조론은 그렇게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편리하다. 신앙의 증명이 이렇게 편리하다면 창조론을 지지못할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박예의 정신을 시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행동을 요구하는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논란이 많다. 꼭 행동을 해야만 하느냐,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말하거나 또 혹자는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신앙인들의 사이에서 논란이 된다. 즉,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히는 것이다.

   행동을 요구하는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논란이 나타나지만 행동이 요구되지 않는 창조론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신앙인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화론은 영원히 금기와 같은 단어가 된다. 만일 어떠한 목사가 진화론이 옳다라고 말한다면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창조론의 바로 그 편리함이 숨어있는 듯 하다. 행동이 필요하지 않는 이론이지만 나의 신앙이 증명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합리적이고 신적인 것인가!!할렐루야!!

   결론을 내린다면 진화론은 신을 부정하는 듯한 뉘양스에 자신에게 약간은 부담이 된다. 또한 주변의 같은 신앙인들의 사이에서도 쉽지 않아보인다. 반대로 창조론은 그 어떠한 신앙적인 행동과 도덕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냥 지지만하면 내 신앙은 증명되어진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신앙적인 행동 및 도덕적 행동도 원치 않는다. 그렇지만 창조론은 지지한다!! 나는 고로 신앙인이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그 밑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등산을 마치고 잠시 쉬면서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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