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3일 목요일

신과 도덕 사이에서

신이 없어도 인간은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

신은 없다. 모든 종교는 틀렸다! 도킨스는 수많은 과학적 논증을 펼치며 신이 없음을 입증하고,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 그리고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신에 대한 부정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다. '인간을 주목하라.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

신에 대한 부정이 도덕적 타락과 연관될 수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신을 믿는 집단과 믿지 않는 집단간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즉, 신을 믿는다는 사실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자가 도덕적 타락에 빠진다는 과학적 근거 또한 없다.




이러한 논거를 주지하고 성서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파악해봐야한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행위를 한다. 신앙이라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자식을 죽음에 이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간다. 물론 아브라함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무슨 속마음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식이 제물로 받쳐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결코 쉽지 않는 문제이다. 기독교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순종이라고는 말하지만 일반적은 경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고 실제로 아브라함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설교에서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그것이 굉장히 인간을 원초적인 부분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충분히 목사와 하나님을 대등하게 놓고 목사의 명령에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메세지를 던진다.




반면에 다른 논증도 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가 정확하게 어느시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는 시절인 것은 확실하다. 자식을 번제의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아주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한국에도 순장이 있었고, 인더스의 산맥에서는 어린 소녀를 제물로 받쳤다. 특히 심청전의 경우에도 사람이 제물이 되어서 바다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즉, 인간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아주 오래전에는 당연스럽게라고는 말하기에는 필자의 도덕적인 양심이 허락을 할 수 없으나, 어느정도 사회적인 용인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는 그 당시의 어느정도 용인되었던 시절임을 의미한다. 분명 성서에서도 이방종교인들이 번제를 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종교적인 순응과 순종이라고 단적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분명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고 예수님은 밝힌다. 너희가 악인이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음을 밝힌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마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사회적으로 허용된 형태에서 행동한 것이다. 자식을 바치는 행위가 어찌보면 도덕적인 행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최소한 그 사회가 그러한 번제를 용인한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다수의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쓴다면 오히려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매우 위험스러운 부분이다. 이제는 자식을 제물로 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회가 정해놓은 형벌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아브라함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식의 생명을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는 사회가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사회적 법, 도덕, 종교 등이 부모의 모든 권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부모가 곧 법이고, 도덕임을 말한다.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신앙인이라는 전제를 놓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성서에서 아주 특별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완전 무결한 신앙인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그가 신의 명령을 받고 자식을 제물로 받치는 행위는 세상 모든 사람이 비난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 자신은 옳바른 행위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쯤에서는 도덕이라는 존재는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신에 의한 계명이 최고선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은 인간과의 주고받고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무한의 축복을 내리는가하면 인간을 재앙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식을 번제에 받친 것은 아닐까. 신에게 자신의 신앙적인 부분을 증명해야했고,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킨 이유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 행해졌다고 말할 수 잇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한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 아닌 신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누구나할 것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존재임은 아주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순수한 절대선이 될 수 없다. 성서가 밝히고 있듯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절대적 선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부분은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이 주장은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이기심에서 완전하게 해방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러한 논증은 도덕적인 옳고 그름보다 신에 의한 계명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때문에 이들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한 부류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신을 믿는 다는 부류가 믿지 않는 부류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논리적 근거는 아브라함를 중심에 놓더라도 논증할 수 없다. 그가 신앙적인 이유로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서의 중요한 10계명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말라. 등의 계명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법은 결코 앞선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최근에 여중생이 납치 및 성폭생으로 살인을 당하자 급하게 법을 재정비하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10계명으로는 살 수 없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살인도 정당방위가 존재한다. 그 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분화되어서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기고 단순하게 살인하지말라라는 신의 계명은 지난 시절의 법이 된 것이다.

누가 더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에는 딱히 답을 내릴 수 없다. 분명 신을 믿는 부류에는 아주 극도의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성도들이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아브라함의 설교는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굉장한 원초적 감정을 자극하고 자칫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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