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까지

  의사결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사사로운 살인이 최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시기까지 여전히 식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는 최근까지 식인을 했던 부족을 촬영했던 다큐도 있으며, 그것을 보고 식인도 하나의 문화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식인을 문화로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애초에 인간의 본능적인 살인은 창세기에서 나타나듯이 가인의 사례를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도 그렇지만 특정 부족에게 남아 있는 식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선택되어지는 특징을 지닌다. 가인도 종교적인 의식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에 대한 분노와 시기심이 살인을 충동질 했다. 식인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행사는 꼭 들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지 않은 행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종교적인 것으로 그것을 포장한다면 죄의식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가인이 살해를 하고 하나님이 부르자 그는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인가라는 질문으로 오히려 되묻는다. 뻔뻔함의 내면에는 종교적인 의식이 이미 끝났음에 대한 기대치가 들어가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매커니즘은 식인을 하는 부족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그런데 식인을 하는 부족과 현대사회에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그리고 명예로운 죽음에 이르는 것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는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나오는 필수가 되어 있는 것이며, 반대의 경우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요인과 명예에 관련된 요인이 주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넓게 본다면 식인을 하는 경우는 더 이상 노동력을 공동체에 제공할 수 없어서 잉여생산물을 낭비만 하는 존재에 한해서 실행된다.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에 관해서 오랜 시간을 걸쳐서 축적된 것이 없어야 한다. 적어도 오랜 시간을 두고 이어져 오는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에 관한 전수할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상황이다. 정말이지 더 이상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인간 본래의 가치라는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그러한 원시적인 공동체에서는 인간에게 "효"라는 지적인 산물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효"라는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지적 산물은 고도의 학술적인 용어임을 인지한다면 문명이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현대문명의 살인들은 철저하게 경제와 명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낙태와 영아 살애의 경우는 부담스러운 경제력을 안으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피와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게으름의 도피행위이다. 게다가 거기에 대상이 유전적인 결함이나 신체적인 결함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 심화된다. 안락사와 명예로운 죽음의 경우는 자신의 자존감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조금더 명예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죽는 순간의 고통도 있기 마련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것 중에서 고통은 버리고 즐거움만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기심과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실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주는 파장은 무엇일까? 단기적으로 본다면 더 이상 사회에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없는 인간이 커다란 비용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자존심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의 죽음의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원시공동체도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은 생존에 대한 강력한 욕구이다. 살아야 한다는 욕구는 그 어떠한 것보다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는 전쟁이 발발하면 남성의 경우는 성욕이 제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각종 성폭력 등이 전쟁이 끝나고 발발한다. 때문에 전투에서 여성과 남성은 결코 같은 부대에 놓고 같은 전투를 못 치르게 되어 있다. 전투력의 급감을 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본능을 경제적, 명예를 위해서 억제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놓은 문명에 역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린 세계는 잔인함 그 자체이다. 그것이 파시즘의 시작이고, 필요없는 존재들,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에서 사용했던 논리와 동일하다. 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과학적인 논리를 거쳐서 정당성을 얻는 순간에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명예로운 죽음 등은 명백한 자살 혹은 타살이다. 그러한 것들이 정당성을 얻고 있다면 다음 타켓은 불특정 다수에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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