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문화와 종교

인간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날아가는 새가 새똥을 싼 것과 내가 벤치에 앉아 있던 것은 아무런 내적 관련이 없으며, 두 사건이 우연히 연결되어 내가 새똥에 맞는 일이 발생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고 사건의 경중에 따라 이러한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재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규칙적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통 종교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따라서 종교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다른’ 더 높은 현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지닌 중요한 측면 중 하나가 집단적으로 종교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개인적 신앙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개인적인 종교는 없다. 종교 의식은 노래, 기도, 춤, 의식을 수반하는데, 이런 과정은 한 공동체에 속한 신도들 간의 결속과 개인의 소속감을 강화시켜준다. 종교 활동은 한 개인이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존경을 표할 수 있게 한다. 숭배, 제물, 의식 또는 기도를 통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와 접촉하려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 절대적 존재의 보호를 바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존재에 대한 공포감에 기인한 것이다.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경험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초월’하여 영적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높은 세계라는 개념은 흔히 개인적 차원에서 인지되며, 신과 관련이 있다. 종교는 존재-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속에 스며들어 그들에게 어떤 목적의식을 부여한다.
 

이러한 종교적 감정은 ‘경외감’과 ‘보호받는 느낌’가운데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종교적 감정은 상충하는 면이 있다. 종교에서는 신성한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믿으며, 개인은 그 존재를 숭배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완전해지는 기분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은 이 전지전능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 기도, 종교 의식은 사람들은 신성한 힘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그래서 그 존재로부터 보호를 받고 지침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종교에서, 신을 비롯한 더 높은 곳에 있는 존재는 윤리적 행도의 지침을 주기도 한다. 그런 신성한 계율은 인간들을 이끌고 지도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계율로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순리는 죽음이라는 명제이다. 때문에 죽은 자들을 매장하고 추모하는 것은 가장 오래된 종교 행위에 속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종교적 믿음의 한 부분을 이루어왔다. 많은 종교들이 사람은 죽으면 심판을 받아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나뉜다고 믿는다. 죽음 이후의 삶은, 그 사람이 살아생전 했던 행동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많은 종교들은 생각한다.
 

죽음은 개인적인 경험 이상의 문제이다. 인류학자들은 삶의 집단적 성격을 보여주는 관점에서 죽음을 연구해 왔다. 브로니스로 마리노스키Bronislaw Malinowski같은 인류학의 개척자들은 죽음을 모든 종교의 기원으로 보았다. 그가 마술과 과학, 종교 사이에 그어 놓은 경계선은 이 점을 확신하게 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모든 문화의 시원이라고 보고 있다. 죽음에 관해서는 고고학자들도 인류학자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중개인들이다. 죽은 자의 시신을 대상으로 행하는 의식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미개한 유인원 상태에서 점차 진화하여 지금과 같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를 고고학 기록에서 보게 된다. 장례에 대한 관심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동료 인간이 시신을 먹는 물리적 공격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관심은 지성과 존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야만적인 동물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죽음은 두 개의 모호한 얼굴을 - 때로는 유용하겠지만 -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죽음의 계곡을 걷는다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는 역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의식해야 된다.
 

죽음, 즉 무덤 앞의 묘비와 관 속의 사망자 발 위에 놓인 대석이 상징하는 죽음은 인간 조건의 양극인 탄생과 사망의 경계를 분명히 가르는 영역이다. 죽음이란 말은 세계적으로 어느 문화에서든 기피하는 대화 소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대화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므로 질서의 파괴자일 뿐이다. 죽음을 좀더 정확한 말로 표현하면 당신은 ‘잠재적으로 최고의 건강 유지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혹은 ‘마지막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했다’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레이미족은 ‘고추농사 지으러 가버렸다’는 부재의 표현으로 죽음을 암시하고 또 알래스카의 트링기트족은 ‘숲으로 가버렸다’고 표현한다. 말레이어 사전에는 회교도의 죽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지만 짐승이나 이교도의 죽음에 사용하는 ‘멤푸스mampus’를 문화적으로 통찰력 있게 분류시켜 놓았다. 모든 죽음을 가리키는 보편적 어휘는 아직 없지만 우리의 언어에는 특별한 유형의 죽음을 지칭하는 어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는 하나의 문화권의 특징을 구별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서구중심의 역사관은 인류가 쌓아놓은 문화적인 흔적들을 소멸시키고 있다. 에릭 울프의 『유럽과 역사가 없는 사람들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비서구 사람들, 특히 오지의 원주민들은 세계사와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온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학문적 편협함을 벗어나 지금까지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지평 위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들에게도 역사를 움직여가는 주체로서의 되돌려주고자 하는 연구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유럽이 아닌 지역의 종교적인 회복은 넓게 본다면 편협적인 역사기록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탈식민의 원석이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김영수,『동남아의 종교와 사회』, 오름, 2001.
니겔 발리, 『죽음의 얼굴』, 고양성 역, 예문, 2001.
말리노우스키, 『원시신화론』, 서영대 역, 민속원, 2001.
발터 하이시히, 『몽골의 종교』, 이평래 역, 소나무, 2003.
월터 캡스, 『현대종교학 담론』, 김종서 역, 까치, 1999.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일조각, 2007.
한국문화인류학회, 『낯선곳에서 나를 만나다』, 일조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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