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3일 목요일

- 카톨릭 스캔들 - 신이 되어버린 인간의 고독

   뇌과학으로 인해서 인간의 뇌에서 신을 만든다는 이론이 어느정도 인정받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에서 80프로 이상은 시각적인 부분에 의존한다.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적인 정보를 보충해주는 역활을 한다. 물론 시각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임은 감각적인 정보는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증명해준다.


인간의 뇌가 신을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그려져야함이 마땅하나, 이 땅의 신의 형상은 수 없이 많다. 물론 신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인간이 그들을 신이라고 명명하고 신이 되었다. 누가 신의 형상을 만들었을까. 분명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었으나 만든 부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서 짧은 글을 써본다.


요즘 카톨릭의 위기이다. 아동 성폭력이 있었다는 주장과 함께 교황청까지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 CNN의 보도를 보면서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도 왠지 피해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성에 대해서 사회적인 감시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이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인 성에 대한 갈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어하는 힘이 무엇일까? 왜 또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간이 신에게 필요한 존재이든 그 반대이든 확실한 사실은 인간과 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신이 진짜이든 아니든 우리는 사회에서 신의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마주대한다. 인간에게 있다고 믿어지는 속성에는 도덕성이 있다. 인간은 본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내재적 장치가 있는 듯 하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의 경우에도 그 죄책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해지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 인간은 끊임없이 순수함과 순결함이라는 이념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사형수들은 사형을 받아들일때에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라는 부류가 있고 그 반대로 자신은 끝까지 무죄임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전자는 사형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부류이고 반대는 자신의 도덕성을 끊없이 주장하는 부류이다. 어찌되었든 두 부류는 도덕성을 인정하는 증거이다. 사형수라는 극소수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도 그러한 도덕성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나 정도면 된다라고 믿고 살아간다. 즉, 모두가 다 순결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이 욕망이 혹시 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 순수함의 갈망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종교는 인간 세상에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신은 소수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많은 사람들이 과도한 논리와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맡고 손가락으로 만질 수 있고 심지어 입으로도 맛을 보아야 한다. 그만큼 일반 대중은 매우 가볍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다. 이성적 논리는 그렇게 잘 안통한다.


그렇다면 가장 손쉬운 대상이 무엇일까? 그렇다 신의 영역에 인간이 들어가면 된다. 집단에서 극소수의 인원을 신의 영역에 넣어버리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어버린다. 주변에 동식물과 태양 달 등을 신의 영역으로 넣을 수 있으나 그것들을 위한 제사장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아마도 처음에는 주변의 것들을 신의 영역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인간이 지명한 신의 대리인이 되었다. 필자가 생각한 부분이 바로 지금의 영역이다. 누가 제사장을 했을까. 어찌되었든 누군가는 해야했을 것이다. 그사람은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했다.


신의 대리인이 아닌 사람들은 일상의 삶에서 이제 자유를 얻을 수 있겠금 되었다.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인이 있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제어하면서 대리적인 도덕적 행동에 만족해한다. 실제로 제사장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아야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이지만 신의 대리인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중에게 보이는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은 대리인의 도덕적인 부분에 관해서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도적적인 부분을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지금의 카톨릭도 유사하다. 우리는 종교의 수장에게 바라는 것은 끊없는 도덕적인 순수함과 순결함을 요구한다. 또 그렇게 바라고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스캔들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기대했던 도덕성이 훼손되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원히 신의 영역에 남아야 자신들이 더욱 편하게 살수 있게된다. 그러나 어찌해야하나. 그들은 분명 신의 대리인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다. 끊임없는 사회의 시선에서 피하고 싶지는 않을까. 차라리 밖에서 자신도 시선자가 되기를 바라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바로 그러한 시선의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이들이 스캔들의 주인공들이라고 판단된다. 신의 대리인에서 내려오자니 밖에서 생산에 참여하기란 어찌보면 또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라고도 생각되니 이렇게 저렇게 쉽사리 못내려오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이라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들도 신을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태양이나 달등을 신으로 만들었지만, 신의 대리인 입장에서는 자신도 신을 만들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그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를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적 신의 형상은 시대를 따라서 조금씩 변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의 대리인이 원하는 시선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종교적 성소에서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냥 위엄스럽게 존재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간적 모습을 그렇게 감출 수 있다. 거의 모든 종교적 형상은 위엄과 근엄의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 그들은 종교적 성소에 들어오는 대중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고개를 숙이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단은 신의 대리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카톨릭의 어마어마한 높이와 웅장함의 건물들은 충분히 대중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중세에 건설된 카톨릭의 성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제가 대중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의 대리인은 이러한 점에 취약하다. 자신을 방어해줄 신의 형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대중의 시선을 잡아줄 수 있는 신의 형상의 부재는 목사뿐만 아니라 그 밑의 장로나 집사에게까지 시선처리가 되면서 덩달아 비난을 받기 쉽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도 신의 형상을 많이 허용한다. 목자의 의미를 담는 그림들이 그것이다. 그와 함께 교회의 거대화도 그것에 동참한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누군가는 부흥이라는 단어로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목사와 일동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거대화된 교회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수 많은 장식품들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목사가 설교할때에 그의 뒤를 장식하는 것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설교도중에 수없이 많은 시선과의 전쟁을 해야한다. "아 오늘은 뒤에 꽃이 이쁘게 피었구나", "금주의 교회활동", "화려한 조명", 심지어 지금은 빔프로젝트까지 정말 목사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게끔 되어있다.



신의 대리인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시선을 피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자신은 신이 아닌데 신처럼 살아야하는 운명이란 슬픈 현실이다. 일본의 천황제도도 그러한 구조이다. 영원히 신으로만 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이 신이 아닌 한 개인을 영원히 대중의 시선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누군가는 일을 안하기 때문에 편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의 고독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진짜로 일본의 천황은 그 자리에서 행복한 시선을 받고 있을까? 그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지만, 영국의 다이애나비의 터널사고는 시선에 대한 점에서 바라본다면 분명 답은 나온다.



카톨릭의 사제나 기독교의 목사나 누구랄 것도 없이 종교적인 속성에 대한 대변자는 모두 괴로운 위치에 있다. 대중이 그들에게 무한대의 신적인 인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대중은 더 편해지는 것이다. 신의 대리인은 형상을 만들면서 양쪽의 시선을 받는다. 형상과 인간과의 시선에서 고립되고 괴로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형상은 입은 있으나 말은 하지못하는 인형이고, 대중은 그들에게 신적인 언어를 구하기 때문에 인간과의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설령 인간과의 대화에서 인간적인 대화를 해버리면 자신의 위치가 깨지기 때문에 쉽사리 하지 못한다. 일반 대중처럼 편하게 말하면 뒤로가서는 호박씨를 심는 것이 또한 대중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신의 대린인은 이렇게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차라리 박물관의 유물품이 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논리에서 가장 잔인하고도 영특한 신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있다. 우상을 만들지말라고 했던 신은 모든 비난에서 회피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용은 이슬람국이 전쟁이라는 시선으로 신의 대리인들이 피하는 것과 마찮가지이다. 그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기독교처럼 언제든지 비난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규율을 아주 잘 지키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의 신의 대리인들은 다른 방법도 사용한다. 그것은 대중에게도 엄격한 신적인 삶을 요구하면서 금기의 삶으로 이끌어간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감시하는 체제로 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엄격한 자신의 시선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결국에는 제사장들에게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서 결국 화살이 대중에게 오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특징은 바로 신의 형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대상을 비난을 하는 것에 쉽게 노출된다.

유대교 이슬람교는 개인스스로에게 끊임없는 규율속에서 시선처리를 한다. 최근에 기독교도 시선의 처리에 굉장한 관심을 두고 있다. 기도의 시간을 중요하게끔 만드는 설교들, 예배의 참석에 두는 것들, 술을 마시지 말것, 담배를 피워서는 안될 것, 사실 규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굉장히 많은 제재들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위의 세가지의 종교는 약간은 극단적인 성향을 뛰게된다. 시선을 개인이 받아버리기 때문에 광신과 영적희열에서 구분하지를 못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의 광신자들은 신의 계명을 받고 비행기에 폭탄을 싫어서 수백명을 죽여도 도덕적 양심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유대교 또한 팔레스타인과의 땅싸움에서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시 제국주의 시절에 침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은 개인에게 그러한 규율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신의 대리인들이 시선처리를 아주 똑똑하게 잘 했기 때문이다. 부담이 없어진 카톨릭 신자들은 자신이 꼭 카톨릭임을 드러낼 필요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들은 분명 카톨릭신자라고 말할 수 있게된다. 왜냐하면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극도로 편안한 종교적 삶에서 이번 사제들의 스캔들은 아마도 충격이 컸나보다. 기대했던 것이 큰 만큼, 자신이 편안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한 만큼이나 충격은 크게되어있다. 카톨릭 사제들은 이 모든 비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 위엄스럽고 강인한 신의 형상과의 대면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속 편할 것이다. 다시금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기에는 오늘밤에도 어떠한 여인을 생각하면서 성적인 욕망에 빠져야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건데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살아갔을까? 12명의 제자들이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3년간으로 추정되는 시간동안 제자들의 시선을 의식한 적은 한번도 없을까? 기독교적 교리에 의하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왔다고 한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존재인 예수님은 누구의 시선을 받았을까.



그의 12제자는 모두 남성이다.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을까? 예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성적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라고말하면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글을 더 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갑자기 너무 궁금해진다. 화장실도 갔을텐데 부끄러워서 분명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만일 안했다면 분명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굉장히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것은 반드시 인간이 기록하기 마련이다. 식사는 어떠했을까. 생선을 먹었던 기록은 남아있다. 빵과 포도주도 남아있다. 그가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 포도주이다. 그것도 아주 맛있는 포도주로 했다. 맛의 질감을 조절했다면 만일 맛없는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그 예식장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육신이기 때문에 아마도 신학적인 논리로 한다면 그는 누구의 시선도 받아서는 안된다. 그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에 시선의 주인이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에는 결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그는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오직 두가지 부류에게만 시선처리가 되어있다.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령과 하나님이다. 오직 이 두 부류에게서만 시선을 받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트리니티(주삼위일체)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만 시선의 대상이 되면서 주체가 되는 존재이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버리면 이 구조가 깨져버린다. 신의 형상이 만들어져버리면 시선의 주체와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신의 형상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실제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되어있기를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고 말한다. 즉,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버리고 신의 존재는 거짓을 스스로 증명해버린다. 신의 형상은 신이 아님은 확실하다. 눈에 보이는 물체는 반드시 이땅에서 형태를 변형받는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의 형상은 인간의 이기심때문에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시선을 받아야하고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까지도 천황이나 국왕을 만들어서 신적인 영역에 계속해서 포함할 것이다.


참으로 흥미있는 글이었다. 신의 형상이 많아지고 위엄스러울수록 대중은 더욱 편안한 종교적 삶을 영위하게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개인이 신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올때에 그가 주장했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랑이었다. 수 없이 많은 규율에서 벗어나 사랑을 외쳤고, 당연히 신의 시선을 율법을 통해서 직접 받고 있던 유대인에게는 굉장히 치욕스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을 빼버리면 그들의 시선을 잡아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율법에 속한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율법타파를 외친자를 죽여야만 신의 강력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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