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교회에서 성도를 묶는 잔인함 - 가족의 이름으로



때로는 내가 지친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가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분위기가 내려가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완전하게 고요함과 끊임없이 쏟아내는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의 거친 목소리만 허공을 찌른다. 바로 그때다. 그 고요함이 흐르고 있을 때. 흔히 말하는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목사도 그렇고 성도도 그렇다. 대략 1시간을 때워야 하기 때문에 목사도 내가 볼때는 거의 할말이 없지만 자기도 무슨 말하는지 모를 말을 해야만 한다. 아무도 반응이 없기 때문에 목사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핵폭탄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공포를 맛 본다. 아마 교회 안에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설교의 내용은 가족으로 넘어간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말에 상당히 낮익은 반응을 한다. 그것에서 만큼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부모의 삶은 자녀의 삶과 동일시되어 있는 세상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교회의 잔인함이다. 그들을 구렁으로 넣고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마약과도 같은 설교인 것이다. 처음 온 사람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설교를 꽁꽁 매듭을 조이기 시작하면 나갈 수 없다. 신앙의 자유로움은 어디론가 증발되어 있다. 남은 것은 나의 헌신적인 자녀를 위한 기도소리만 허공을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많은 간증내용도 그런식이다. 가난한 사람이 기도해서 자녀가 잘 되었더라라는 가장 유치 찬란한 그런 것 말이다. 모두가 다 서울대학교를 가야만 하는 잔인한 세상. 금메달주의라고 해두자. 우리는 그렇게 신화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해간다. 꼭 헌신적인 가정의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만 한다. 어떻게 이러한 공식이 가능할까?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눈물샘과 가치는 철저하게 가족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끝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회의 그 어떠한 체제도 가족을 안전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다. 국가가 가정을 버린 것이고 가정은 살기 위해서 사교육 사보험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하나의 줄이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주의는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와 같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한다. 가족과 같은 교회라는 슬로건이 그것이다. 교회는 어디까지 사회집단이고 합리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그에 비해 비합리적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식사를 줄테니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비합리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꽁자 점심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가정을 나가는 그 순간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거래가 있기도 하고 보이는 거래도 있다. 교회라고 물질 만능주의는 없겠는가? 인간이 활동하는 예배당의 공간에서 그 어떤 누구도 편안하게 자리를 줄이는 경우는 드물다. 무조건 거의 절대적으로 많이 만들어야한다. 사람이 많으면 이유 불명 무조건 좋은 것이다. 100명이 출석인 교회에 500개라는 의자가 있어야 하고 사람은 닭장신세가 되어도 필요없다. 누구의 욕망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기가 막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했다. 우리에게 평안의 예배를 드릴 권리가 있다면 무엇보다 예배당은 깔끔하고 청결하고 또한 인간이 이동하고 행동하는 것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자리배석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을 주님이 주신 것이라 말해선 안된다. 그리고 그곳에 가족이라는 그 잔인함의 단어는 절제되어야 한다. 가족은 중요한 집단이지만 그것으로 인간을 묶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적어도 예배의 그 시간동안에 대한민국의 수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서 자유로움을 얻기를 기도한다. 그들이 그 엄청난 짐을 잠시 내려놓기를 기도한다. 나는 가끔 기도한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움을 얻기를 원하며 나 또한 그러하기를 바란다.


일전에 김대중 대통령 기획경제팀에 들어가지 못했던 어떤 사람이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각종 구호기금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무엇이라고 말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잔인함의 구호기금, 가족애를 자극하고 눈물샘이 터지면 국가는 않아서 돈을 긁어가는 것이다. 태풍이 와도 구호기금, 재난이 터저도 구호기금을 위한 눈물샘만 자극하면 끝난다. 여전히 사회적인 안전망은 없다. 왜 국가참사에 국민의 호주머니가 매년 들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다.


공적기금에 대한 마약중독은 어디에서도 동일하다. 교회도 그러하다. 건축을 위해서 끊임없는 자극들 주님의 뜻 그리고 어마어마한 빛더미가 남는다.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60억이라는 상상도 못할 금액은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헌금은 빛더미의 해결에 쓰이고 그리고도 부족한 금액은 눈물샘과 가족애를 넣어서 포장하고 슬그머니 호주머니를 건든다. 심지어 총신대는 거대화된 교회를 대상으로 매달 10000원 정도에 해당하는 기금헌금을 요구한다. 마치 작은 액수인 것 같지만 그것 역시 호주머니를 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계좌를 만들어서 매달 빠져나가게 하는 잔인한 인간들이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크게는 가족의 확대판으로 이어진다. 가족같은 교회를 강조하고 담임목사가 총신대 출신이고 그렇다면 총신대는 자기내들의 가족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공적자금은 유유히 분출되는 샘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원의 샘이다.


교회가 사회의 어둡고 아쉬운 곳을 건들어야 한다면 구제와 동시에 국가에 건의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물론 교회가 사회단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곳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것인가에 관한 질문의 답을 우리는 혹시 거대화와 가족애가 있는 비합리성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런 것에서 자유하자. 나의 바램이다. 다시는 이 땅에 수능이나 기타 자녀의 삶을 위해서만 살지 말자.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고 영원히 같은 길을 갈수도 없는 나락이다. 아! 이땅의 교회에 수능특별기도회가 사라지는 것이 내 바램이다. 새학기가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이토록 잔인한 마약을 또 다시 시작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수능 300일 200일 100일 50일 10일 기도회 그리고 수능 당일날은 시험시간에 따른 과목별 기도까지 끝도 밑도 없이 자녀를 구설수로 삼아서 마약을 주입하는 것이다.
심지어 태아 기도회까지 교회에 들어가는 그 순간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다를 것이 있는가. 그 모든 것에 내 자녀가 서울대학교를 갈 수 있다는 환상이 깊에 박혀 있는 것이다. 자녀가 내 것이 되어 있는 신앙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려놓지 못하는 잔혹함. 탈무드의 한 사례가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표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랍비가 어느날 아내에게 "누군가가 보물을 맡겨 놓고 찾으러 왔을 때에 줘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곧 랍비는 당연히 줘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아내가 주인이 와서 보물을 가져갔다고 말한다. 이에 랍비는 의미를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례이다. 나에게 소유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면서 이땅의 부모라는 입장에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겪어야하는 고민거리이다. 그들이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 같지만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신앙적인 훈련과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한 고민이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두가 다 탈무드의 예처럼 차분할 수 없으나 영화나 TV를 통해서 보는 장례식의 풍경을 한국과 외국을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은 울어야 한다. 무조건 눈물의 바다가 되어야 하고 또 곡을 해야한다. 하지 않는다면 무정한 놈이 되고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그러나 외국의 사례를 본다면 눈물을 흘릴지언정 한국과는 사뭇 정숙함을 유지한다. 그들의 사뭇 정숙함의 장례식은 기본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신앙의 표현으로 판단된다. 김수환 추기경이 죽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신자들을 보라. 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잔인함이고 가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확대판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