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태극기를 등에 달고 질주하는 폭주족의 내면세계에 관하여

태극기를 등에 달고 질주하는 폭주족의 내면세계에 관하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영원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한국인이라는 것부터 정의해보자. 한국인, 필자가 지금까지 지겹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주제이다. 무엇이든지 한다는 기가막히는 이야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무엇이든 한다라는 것에 개인이 희생을 당하는 것은 두번째의 일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횡포를 하는 것이 당연한 국가는 여전히 야만적인 사회집단일 뿐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소속된 학교를 절대화하는 것은 국가를 절대화하는 교육의 일환이며, 학생과 스승은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비합리적인 것들이 실제적인 사회체계에 들어오는 것이다.


   학생과 교사는 서로 무관계의 이익집단이다. 학생은 교사에게 필요한 것만 배우면 그만이고, 교사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법과 행정처리로만 여기면 된다. 여기서 사적 감정은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냉정하게 학생을 대해야 한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도 아니다. 이 행정적인 관계의 기본조건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이것이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곳 짐승의 세계와 사뭇 닮은 한국에서는 개인의 존재를 끊임없이 다른 개인과 연관을 시키는 연습을 한다. 몇회 졸업생은 영원하다라는 구호 등이 그것이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시민사회는 잔인한 정글이다. 이곳에는 맹수를 견제할 수 있는 아무런 사회적 제도가 부재하기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길거리로 내몰리는 학생들, 성인이 되었지만 자신의 존재를 못찾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배웠던 태극기와 오토바이의 질주 뿐이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3.1절이라는 어떻게 되어진 사건인지도 모른채 달린다. 그들의 등에 태극기가 있다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정치가의 입가에는 웃음이 슬며시 나올 것이다. 무엇인가 허전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잔인한 구석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발톱빠진 젊은이들은 국가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태극기가 필수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의 젊은이들과 학생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다. 국가는 결코 비판하는 자세를 가진 학생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들의 권력의 뒷마당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오토바이의 기름이 바닥나는 그곳에 대한민국이라는 실체를 찾을 수 있는가? 한국인, 대한민국, 효 등은 모두가 다 환상성을 우리의 가슴에 심기위한 장치일 뿐이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결박할 수 없는 나, 나는 내가 되기 위한 육체이다라는 사실, 그 무엇으로도 나를 의미부여 할 수 없으며, 오직 내가 나에게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정말로 나는 나를 의미부여 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다면 당신은 신을 찾을 수 있다. 그때에 당신에게 주님이 다가 올 것이다. 주님은 말씀했다. 찾으라, 구하라, 두드려라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맹목적으로 질주하지 말고 냉정하게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주가 잔인한 존재도 아니다. 그가 잔인했다면 애초에 이 땅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이 땅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말이 그렇지. 오토바이타고 태극기를 등게 달고 달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참 암담하다. 뭐가 그렇게 가슴에 응어리가 쌓여있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애국을 해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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